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3/5 옥녀봉, 서악권역

[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3/5 #1 (김유신장군묘, 무열왕릉,진흥왕,진지왕,문성왕,헌안왕,서악동고분군) ] ■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왕릉탐방 3/5 (김유신장군묘,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서악동고분군, 무열왕릉, 법흥왕릉) ▶ 탐방일자 : 2023.12.03(일) ▶ 날씨 : 맑음, 미세먼지 : 보통 +----------☆----------○-----------◎----------◇----------□----------+ ▶ 코스1 : 화랑마을 주차장 -> 옥녀봉 -> 김유신장군묘 -> 공개석실고분(돌방무덤) -> 흥무로 -> 서천뚝방길 -> 서악서원 -> 선도산고분군 -> 24대 진흥왕릉 -> 25대 진지왕릉 -> 46대 문성왕릉 -> 47대 헌안왕릉 -> 서악리삼층석탑 -> 보희연못 -> 서악동고분군 -> 29대 무열왕릉 -> 태종무열왕릉비 -> 김인문묘,김양묘 -> 서악동 귀부 -> 무열왕릉 주차장  ◆ 탐방 거리 :  11.5 km ◆ Ramblr(램블러) GPS Log : http://rblr.co/onFmO +----------☆----------○-----------◎----------◇----------□----------+ ▶ 코스2 : 무열왕릉 주차장 -> 차량이동 -> 효현동 삼층석탑 -> 23대 법흥왕릉  ◆ 탐방 거리 : 4.8km (도보 0.5km)  ◆ Ramblr(램블러) GPS Log :  http://rblr.co/onFxH +----------☆----------○-----------◎----------◇----------□----------+ ※ '신라왕릉' 네이버 지도 저장(즐겨찾기) 기능 이용하기 https://naver.me/xecn79Pc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탐방에 대한 생각은 다른 글에 남긴다. #경주남산왕릉탐방 #신라왕릉가는길 #신라왕릉길을걷다 #경주왕릉 #신라왕릉 #왕릉탐방 https://blog.naver.com/kimbak65/223266819863 +----------☆----------○-----------◎----------◇----------□----------+ ■ 탐방 개요 #경주 #경주남산 #세계문화유산 #경주남산문화유산탐방 #문화유산탐방 #문화유산탐방산행 ◆ 3차 탐방개요 화랑마을을 출발하여 옥녀봉 지나 김유신장군묘 탐방 후 서천내 강변을 따라 이동 선도산의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탐방 후 서악고분군과 무열왕릉 탐방을 마치고, 차량으로 이동하여 법흥왕릉 탐방 ▣ 탐방 후기 이번 왕릉탐방은 시내 중심부에 무덤을 세우던 적석목곽분의 마립간기를 지나고, 주변으로 벚어나 무덤을 독립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의 왕릉과 고분군 탐방dl다. #화랑마을  화랑마을은 고귀한 문화유산인 화랑의 정신과 문화를 재조명하고, 확대 발전시키고자 하는 시설이다. 9시 이후 개장이라 내부 관람은 못하고 바로  '화랑의길' 산책로를 따라 옥녀봉으로 오른다. #옥녀봉 (276m)  옥녀봉은 도심 속이라 경주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산이다. 전국의 산에 옥녀봉이란 봉우리가 무척 많은 편인데, 저 마다의 유래가 있을 듯싶다. 이곳의 유래는 마을 뒷산 옥녀봉에 하늘에서 내려온 여자 산신(옥녀)이 살고 있었는데, 이웃 마을 남자 산신이 이 땅을 빼앗으려고 쳐들어 왔고, 옥녀가 남신을 물리쳤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 곳에다 나무를 심고 당산제를 지내며 옥녀를 위로하였다고 한다.  매일 옥녀봉 길에 맨발 등산과 플로킹 하시는 페친님이 정성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참한 표식을 만났다.  2009년 12월 울산 MBC는 다큐멘터리이라는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첨성대를 기점으로 한 경주의 왕릉 및 건축물이 하늘의 별자리와 일치한다는 내용을 방영하였다.  현재 이 방송을 다시 보기 할 수가 없지만 일부 영상은 유튜브에서 확인 할 수 있다. 2017년3월17일 KBS 역사실험 [황금기사의 성 2부 여왕의술잔 /천년도시 금성의 비밀] 방송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https://youtu.be/NtXpVtWg6gI?si=tT6hhgei2VaIFIbY 첨성대를 중심으로해서 왕릉이 계획적으로 들어섰다는 것인데, 옥녀봉-> 김유신장군묘 -> 첨성대-> 월성 -> 선덕여왕릉 -> 불국사 -> 문무대왕릉이 일직선상에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가 없어 보인다. 신라 1000년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첨성대를 기점으로 동지일출선이 지나는 축에 김유신장군묘와 문무대왕릉(정기호교수) (송민구 교수의 저서 [한국의 옛 조형의 미] #김유신장군묘 신라 왕릉 탐방에서 김유신장군묘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흥무대왕으로 추존도 되었고, 진위 여부를 떠나 능의 규모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장군(595~673)의 묘로 알려져 있다.  왕릉은 신라 역대 왕릉 또는 귀족들 묘보다 넓게 면적을 차지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김유신장군의 묘 앞에는 동서로 두 개의 비석이 마주 보고 있다 김유신장군이 돌아가시자 문무왕은 예를 극진히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묘비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그 묘비는 전하지 않고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두 기의 묘비는 후대에 세운 비석이다 서쪽에 보이는 비석은 비문과 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앞면에는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 조선 중엽에 세워졌으며, 동편의 묘비는 1970년대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렬흥무왕릉)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비가 오면 동편 비의 '능(陵)'자가 '묘(墓)' 자로 겹쳐 보인다고 한다. 누군가 이곳이 능이 아닌 묘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무덤의 주인의 지위에 따라 무덤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릉(陵) : 왕과 왕비(추존된 경우도 포함)의 무덤 묘(墓) : 대군이나 공주.후궁, 일반인 등의 무덤. 신라 김유신처럼 왕이 아닌 경우는 '묘' 라 부른다 묘 탱석에는 십이지신상을 부조하였는데 이는 8세기 후반과 9세기의 형식으로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무덤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기도 하다. 신라 왕릉에서 12지상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8세기 중엽 33대 성덕왕릉부터이며, 이후 55대 경애왕릉까지 23기의 왕릉 중에서 12지상이 발견된 곳은 9곳으로, 성덕왕릉, 원성왕릉(괘릉), 경덕왕릉, 진덕여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김유신장군묘, 구정동 방형분, 능지탑 등이 있다. 무덤 주변에서 곱돌로 된 말,돼지,토끼의 십이지신상이 출토되었는데, 말과 토끼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돼지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같이 있으면 조으련만 이렇게 따로 보관하는 것인지 능 조성 당시에는 무열왕릉과 같은 호석 구조였으나, 42대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증 시호를 내린 직후 또는 36대 혜공왕 때 개수한 것으로도 추정한다. 그렇다고 직계 조상인 무열왕릉은 두고 김유신장군묘만 화려하게 개수했다는 것도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현 무열왕릉 앞 김인문묘가 김유신묘라는 주장과 함께 이곳은 경덕왕릉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유신장군은 삼국 통일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삼국사기 인물 열전의 제일 앞에 있으며, 무려 분량이 10권의 열전 중에 3권이나 되는 량이다. 경주 김씨인 김부식의 사심이 가득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 가야와 신라의 왕족 반반이라 할 수 있는 출신으로, 진평왕 대에서부터 문무왕 대까지 5대의 임금님을 모시고 삼국통일로 가는 과정에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신라의 가장 위대한 장군이다. 남산 통일전에 삼국통일의 3대 영웅호걸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장군 3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김유신장군의 동상이 경주 황성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돌방무덤공개석실고분 김유신장군묘 순환도로는 봄이면 벚꽃으로, 가을이면 단풍으로 정말 걷기 좋은 아름다운 길인데, 중간지점에 돌방무덤이 하나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이렇게 돌방무덤 형태를 이룬다고 한다. 이렇게 무덤의 형태를 공개해 두어서 이해에 도움이 되는 듯하다. 신라의 한 무덤 형태를 볼 수 있는 유익한 공간이기도 하다. 낙엽마저 다 떨어진 흘무로 벚꽃길을 지나, 겨울바람 세차게 불어오는 서천뚝방길을 지나간다. 뚝방길에서 동쪽은 남산이 서쪽은 선도산이 보이고, 선도산 아래로 고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서천 뚝방길이 금계국 꽃길이라고 한다. 길에도 금계국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내년에 함 와야겠다.  #서악서원  #신라문화원 #선도산고분군 서악서원을 지나 올라보면 고분군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경주 시내를 바라보거나 무열왕릉과 서악동고분군을 바라보는 경관은 정말 아름답다. 서악마을은 신라문화원의 문화재돌봄사업단의 다양한 사업으로 마을 일대가 깔끔하게 정비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문화유산으로 인한 개인 사유재산 활용 등에 제약이 많았을 텐데, 신라문화원의 혁신적인 구상을 바탕으로 정비사업을 통해서 개선한 가장 모범적인 마을이라 하겠다. 서악동 삼층석탑과 함께 경주에서 가장 멋진 마을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봄이면 작약꽃이 가을이면 구절초가 만발하여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서악마을 정비 사업 전에 대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수십개의 고분군이 본 모습을 나타났는데 선도산고분군 이다. 왕릉급으로 추정되는 서악동고분군의 배장으로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라 왕경 서편인 선도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상의 말단부에 4분의 왕릉이 비정되어 있다. 위에서 아래로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 46대 문성왕릉, 47대 헌안왕릉이 순서대로 위치해 있다. 조선 영조 6년에 비정되어 현재 시적지로 지정되어 있다고는 하나, 실제 왕릉으로 보기 어렵고, 아래 서악동고분군이 왕릉으로 추정되는 공간이다.  #진흥왕릉 (24대 진흥왕) 맨 먼저 만나는 임금님은 24대 진흥왕릉 이시다. 진흥왕의 업적에 비하면 왕릉이 너무 초라한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이 먼저 든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아우 김입종의 아들이며, 7살이 되던 해에 왕위에 올랐다. 화랑의 시초가 되는 선화와 원화제도를 도입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어린 진흥왕을 대신해 섭정을 하였던 지소태후에 의해 불교 발전은 왕실이 이끌게 되고, 호국불교로 발전하게 된다. 황룡사를 세운 시기도 이때이다. 또한 신라의 영토가 크게 넓어져 가야 땅을 모두 병합하고, 한강 지역을 점하였다. 현재의 능은 삼국사기 장지로 기로된 '영경사북봉' 과 동남쪽 아래에 있는 서악동 삼층석탑을 근거로 조선 영조 6년에 김씨 문중에 의해 진지왕릉과 함께 지정되었다. 영경사터로 추정된 서악동 삼층석탑의 탑 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진흥, 진지왕릉이 조영된 6세기가 아니라 9세기 후반의 사찰로 보고 있어 잘못된 왕릉 비정이란 지적이 있다.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으로 경주김씨 문중에 의해 진흥왕릉 부터 일렬로 일가의 왕릉을 줄 세우기 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진지왕릉 (25대 진지왕) 25대 진지왕은 24대 진흥왕의 차남으로 왕위를 이었으나, 허수아비 왕으로 타락한 삶을 살다가 폐위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즉위 후 왕권은 사도태후와 미실에게 있었고, 왕권을 상실한 진지왕은 정사에는 안중이 없고, 애첩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였다. 진지왕의 색욕은 궁궐에 한정되지 않고 민가의 아낙과 소녀까지 가리지 않고 관계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다 결국 사도태후와 미실에 의해 폐위된다. 진지왕의 손자가 무열왕 김춘추 이다. 능은 진흥왕릉 10m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폐위된 왕은 진골에서 성골로 강등되었지만, 이러한 위치에 왕릉이 조성되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문성왕릉 (46대 문성왕) 조금 더 아래로 내려오면 46대 문성왕릉 이 있다. 문성왕은 44대 민애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45대 신무왕의 장남이다. 신무왕은 6개월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에 종기를 앓다가 죽었는데, 당시 반정에 공을 세운 장보고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였다.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맞이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유언으로 남겼는데, 문성왕이 약속을 지키려 하자 평문 출신의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 할 수 없다는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고, 결국 포기하게 된다. 이로 인해 장보고와의 관계가 나빠지고, 장보고는 부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함으로써 청해진이라는 해상권력을 잃게 되기도 한다. 문성왕의 후손이 신라의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이 된다. 현재의 능은 조선시대 이래 서악동 선도산 일원을 '산작지'라 불렀는데, 이를 문성왕, 헌안왕의 장지인 '공작지'와 동일시한 까닭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영조 6년에 김씨 문중에 의해 헌안왕릉과 함께 지정되었다. 동남산 현재 헌강왕릉 정강왕릉 자리가 문성왕릉과 헌안왕릉이라는 주장도 있다.  #헌안왕릉 (47대 헌안왕)3 47대 헌안왕은 45대 신무왕의 아버지 균정의 아들이므로 문성왕의 숙부가 된다. 그런데 문성왕에게는 손자가 있었는데 불구하고, 노쇠한 숙부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은 납득이 잘 안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는 문성왕의 유언을 필요 이상 길게 남겨두었는데 정파 간의 모종의 결탁이 있었다고 할 만하다. 헌안왕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둘째가 태봉의 궁예라는 이야기가 있다. 헌안왕릉 옆에는 조선시대 양반의 무덤이 왕릉을 침범하여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이 왕릉일까 싶다.  #서악동삼층석탑  모전석탑의 형식으로 남산의 용장계 지곡 삼층석탑과 남산동 삼층석탑(동탑)과 닮았다. 탑신석의 금강역사상이 햇살을 받으며 어린아이 웃음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듯 보인다.  장난치듯,  우측 금강역사는 근무 중에 나 잠시 놀러 갔다 오께 하는 듯하고, 좌측 금강역사는 금강저를 손에 잡고 안돼 어디가 하며 소리치는 듯하다.  ㅋ #보희의꿈 '어느 날 문희(김유신의 동생)의 언니 보희가 서악(西岳)에 올라가 오줌을 누웠는데, 경성(서라벌)에 가득 찼다'라는 꿈을 꾸었고, 동생인 문희가 언니 보희의 꿈을 싸서 김춘추의 옷고름을 꿰매준 인연으로 왕비가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김유신의 의도된 계획이었다는 추정도 가능한데, 그 꿈과 관련된 연못이 샛골못(보희연못)이 있다. 보희도 나중에 김춘추의 후궁이 된다.(화랑세기) 연못 옆으로 서악동고분군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는데, 이제는 자물쇠로 잠가버렸다.  탐방객의 동선을 고려하여 들어가도록 하고, 나가면서 입구에서 표를 발급받도록 하면 안 될까 싶다.  탐방객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다.   무열왕릉과 서악동고분군을 만나기 위해 내려가서 다시 올라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서악동고분군 5세기말 6세기초에 이르러 왕경의 발달로 인하여 경주분지 내 평원에서 무덤을 조성하던 적석목관분 시대를 마감한 후 왕릉이 최초로 미련한 곳이 선도산이다. 왕성인 월성과 왕릉군은 동서방향으로 놓여 있으며, 거리는 3.3km 이다. 왕릉급 무덤임에도 피장자가 비정되지 않은 서악동고분군에 대해 추사 김정희에서부터 최근 왕릉을 연구하는 학자분들까지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다. (참고 : 대구은행 발행 신라왕릉 책자의 '신라왕릉 주인공 비정에 관한 몇가지 논쟁' : 글_박광열-성림문화재연구원 원장) 분명한 건 법흥왕, 진흥왕,진지왕은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  금 비정되어 있는 왕릉은 귀족의 무덤일 것으로 보인다.  작년 힌남노 태풍으로 훼손된 4호분에 현재 복구공사가 한창이다.  작년 태풍으로 인한 복구공사인데 긴급복구공사라고 달린 현수막 보며 한번 웃었다.  긴급이 이런 말이구나 하고. ㅋ #무열왕릉  제29대 태종무열왕은 이름은 춘추이고, 진지왕의 장남 김용수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장녀 천명공주 소생이다. 603년 태어났으며, 아버지 용수가 죽은 뒤에는 어머니 천명부인이 삼촌 용춘에게 재가하였기에 용춘의 양자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용수와 용춘을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24세 되던 해에 화랑 풍월주가 되었다.(화랑세기) 진평왕, 선덕.진덕여왕 대의 정치 및 외교 문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화랑도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유신 등의 가야파 군벌과 손을 잡고 막강한 힘을 형성하여, 진덕여왕이 죽자, 5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김춘추는 폐왕 진지왕의 손자로 왕위계승이 쉽지않는 상황이었으나, 상대등 알천의 추천과 김유신의 지지로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왕위에 올랐다. 성골로 이어지던 신라왕조는 무열왕을 기점으로 진골 임금으로 변화한다. 660년 당의 소정방이 이끄는 13만의 병사과 함께 나당연합군을 결성하고, 황산벌의 마지막 결투를 승리하고 백제를 멸망시킨다. 의자왕의 항복에 사비성으로 입성하게 된다. 삼국통일을 보지는 못하고, 백제부흥운동과 고구려, 당나라까지의 정리는 아들 문무왕에게 물려주고 661년 죽었다.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는 저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다른 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 백제를 없앤 김춘추”를 가리켜 “역사의 죄인”이라 하며 사대주의자라 비판하였다.  “다른 종족을 불러들여 동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당의 군대를 끌어들여 고구려의 고토 우리의 영토가 줄었다며 신라에 의한 통일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당시 신라, 고구려, 백제가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이 있었을까.  당, 왜, 말갈 등 주변 국들과 같이 그냥 적국이지 않았을까. ? 신라의 통일은 진정한 통일이 아니다, 통일신라라는 표현 보다 후기신라라 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이 맞는 표현인지 아직 판단하지는 못하겠지만,  신라의 통일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그 중심에 김춘추와 김유신이 있다.  이 곳은 무열왕릉비로 인해 왕릉의 이름이 가장 정확한 왕릉이라 할 수 있다. 무열왕릉 앞에는 무열왕 김춘추와 문명왕후 문희의 사랑을 확인시켜주려는 듯 팽나무와 말채나무 아래 밑둥 부분이 붙어 자라다 다시 각자 자라는 연리지가 있다. 무열왕릉 앞은 상석은 신라 때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상석이라고 한다. 이후 왕릉에는 탁자형의 상석이 나타나게 된다.   #무열왕릉비 왕릉 주변에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귀부)과 비석 위에 올리는 머릿돌(이수)이 있는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석은 사라졌지만 귀부와 이수 조각의 아름다움은 그 어느 것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신라에서 묘호(태종)를 최초로 사용한 임금님이기도 하다. 당나라의 항의가 있었지만, 문무왕은 굴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첨성대를 기준으로 볼 때 비슷한 거리에 삼국 통일을 위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3명의 영웅들이 자리하고 있다 김유신장군묘와 무열왕릉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고, 선덕여왕릉은 일직선상에 있다. #김인문묘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이다.  당에서 신라 외교관 역할에 충실했으며,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 패망에 역할을 했다.  당에서 여생을 마쳤고, 효소왕 때에 유해를 신라로 호송하였다.  무열왕릉 주차장 주변에 능이 2개와 비각이 있다. 하나는 김인문묘이고 하나는 김양묘로 비정되어 있다.  #김양묘 김양은 무열왕의 9세손으로 어떻게 이 자리에 묘가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없지만, 김인문 묘 옆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지난번 다녀온 민애왕릉의 몰아내는 역할을 했던 신하였고, 뒤를 이은 신무왕, 문성왕 대의 귀족이다 보니, 이곳에 묻혀 있는 듯하다. 신하가 죽으면 모셨던 왕의 무덤 아래 무덤을 쓰던 배장이란 풍습이 있었다. #서악동귀부 묘지 옆 태종무열왕릉비와 비슷한 모양의 거북 모양의 귀부가 있는데, 주변 서악서원에서 김인문 묘비가 발견되었고, 거리가 있지만 김인문 묘비와 비각을 같은 것으로 보고 김인문 묘로 비정되는데 영향을 미쳤다.  김인문묘가 김유신장군묘이고, 옆의 김양묘가 김인문묘라는 주장도 있다. 김유신장군이 돌아가시자 문무왕은 예를 극진히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묘비를 세우게 하였다고 전한다.  만약 이 주변에서 김유신의 묘비가 발견되었다면 묘 비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김인문 묘비는 경주박물관에 있다. 무열왕릉 주차장에서 효현동삼층석탑, 법흥왕릉 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한다. [ 2023 신라왕경 길을 걷다 3/5 #2 (법흥왕릉) ] #효현동삼층석탑 석탑으로 인해 이곳을 애공사지로 보고 법흥왕릉을 비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법흥왕릉 (23대 법흥왕) 23대 법흥왕은 22대 지증왕의 장남으로 키가 7척이고, 성품이 관대하여 사람들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신라의 국력을 신장시킨 업적으로 500년간 이어온 가야 왕조를 폐하고 병합한 것(삼국사기)과 불교의 공인이다.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는 진흥왕 때에 금관가야가 항복한 것으로 전하여 차이가 좀 있다. 19대 눌지왕 때에 인도 승려 묵호자가 신라에 불교를 전한 후로 21대 소지왕 때 다시 아도화상이 들어와 불법을 퍼뜨렸다. 당시 불교에 대한 반대가 심하였고,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에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다. 이차돈은 왕과 가까운 신하로 "도를 이루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는 말을 전하며 자신의 목을 베어 불교 반대 여론을 꺾어버리라고 하였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은 벤 자리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고, 그 색깔이 젖빛처럼 흰빛이었다. 이로 인해 다음 해인 528년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고, 신라인들은 불법을 만나게 되었다. 현재의 왕릉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애공사북봉'과 동편의 효현동 삼층석탑을 근거로 이 절터를 애공사로 보고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 지정되었다. 서악동고분군 중 한곳이 법흥왕릉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더 타당성이 높아 보인다. 왕릉 입구 농로에 논 주인께서 적어둔 표지가 이채롭다. 쓰레기 버리지 맙시다.

Hiking/Backpacking

Gyeongju-si, Gyeongsangbuk-do, South Korea
dwkim65 photo
time : Dec 3, 2023 8:29 AM
duration : 5h 28m 13s
distance : 16.7 km
total_ascent : 389 m
highest_point : 275 m
avg_speed : 3.6 km/h
user_id : dwkim65
user_firstname : 대웅
user_lastname : 김
[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3/5 #1 (김유신장군묘, 무열왕릉,진흥왕,진지왕,문성왕,헌안왕,서악동고분군) ] ■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왕릉탐방 3/5 (김유신장군묘,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서악동고분군, 무열왕릉, 법흥왕릉) ▶ 탐방일자 : 2023.12.03(일) ▶ 날씨 : 맑음, 미세먼지 : 보통 +----------☆----------○-----------◎----------◇----------□----------+ ▶ 코스1 : 화랑마을 주차장 -> 옥녀봉 -> 김유신장군묘 -> 공개석실고분(돌방무덤) -> 흥무로 -> 서천뚝방길 -> 서악서원 -> 선도산고분군 -> 24대 진흥왕릉 -> 25대 진지왕릉 -> 46대 문성왕릉 -> 47대 헌안왕릉 -> 서악리삼층석탑 -> 보희연못 -> 서악동고분군 -> 29대 무열왕릉 -> 태종무열왕릉비 -> 김인문묘,김양묘 -> 서악동 귀부 -> 무열왕릉 주차장  ◆ 탐방 거리 :  11.5 km ◆ Ramblr(램블러) GPS Log : http://rblr.co/onFmO +----------☆----------○-----------◎----------◇----------□----------+ ▶ 코스2 : 무열왕릉 주차장 -> 차량이동 -> 효현동 삼층석탑 -> 23대 법흥왕릉  ◆ 탐방 거리 : 4.8km (도보 0.5km)  ◆ Ramblr(램블러) GPS Log :  http://rblr.co/onFxH +----------☆----------○-----------◎----------◇----------□----------+ ※ '신라왕릉' 네이버 지도 저장(즐겨찾기) 기능 이용하기 https://naver.me/xecn79Pc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탐방에 대한 생각은 다른 글에 남긴다. #경주남산왕릉탐방 #신라왕릉가는길 #신라왕릉길을걷다 #경주왕릉 #신라왕릉 #왕릉탐방 https://blog.naver.com/kimbak65/223266819863 +----------☆----------○-----------◎----------◇----------□----------+ ■ 탐방 개요 #경주 #경주남산 #세계문화유산 #경주남산문화유산탐방 #문화유산탐방 #문화유산탐방산행 ◆ 3차 탐방개요 화랑마을을 출발하여 옥녀봉 지나 김유신장군묘 탐방 후 서천내 강변을 따라 이동 선도산의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탐방 후 서악고분군과 무열왕릉 탐방을 마치고, 차량으로 이동하여 법흥왕릉 탐방 ▣ 탐방 후기 이번 왕릉탐방은 시내 중심부에 무덤을 세우던 적석목곽분의 마립간기를 지나고, 주변으로 벚어나 무덤을 독립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의 왕릉과 고분군 탐방dl다. #화랑마을  화랑마을은 고귀한 문화유산인 화랑의 정신과 문화를 재조명하고, 확대 발전시키고자 하는 시설이다. 9시 이후 개장이라 내부 관람은 못하고 바로  '화랑의길' 산책로를 따라 옥녀봉으로 오른다. #옥녀봉 (276m)  옥녀봉은 도심 속이라 경주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산이다. 전국의 산에 옥녀봉이란 봉우리가 무척 많은 편인데, 저 마다의 유래가 있을 듯싶다. 이곳의 유래는 마을 뒷산 옥녀봉에 하늘에서 내려온 여자 산신(옥녀)이 살고 있었는데, 이웃 마을 남자 산신이 이 땅을 빼앗으려고 쳐들어 왔고, 옥녀가 남신을 물리쳤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 곳에다 나무를 심고 당산제를 지내며 옥녀를 위로하였다고 한다.  매일 옥녀봉 길에 맨발 등산과 플로킹 하시는 페친님이 정성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참한 표식을 만났다.  2009년 12월 울산 MBC는 다큐멘터리이라는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첨성대를 기점으로 한 경주의 왕릉 및 건축물이 하늘의 별자리와 일치한다는 내용을 방영하였다.  현재 이 방송을 다시 보기 할 수가 없지만 일부 영상은 유튜브에서 확인 할 수 있다. 2017년3월17일 KBS 역사실험 [황금기사의 성 2부 여왕의술잔 /천년도시 금성의 비밀] 방송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https://youtu.be/NtXpVtWg6gI?si=tT6hhgei2VaIFIbY 첨성대를 중심으로해서 왕릉이 계획적으로 들어섰다는 것인데, 옥녀봉-> 김유신장군묘 -> 첨성대-> 월성 -> 선덕여왕릉 -> 불국사 -> 문무대왕릉이 일직선상에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가 없어 보인다. 신라 1000년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첨성대를 기점으로 동지일출선이 지나는 축에 김유신장군묘와 문무대왕릉(정기호교수) (송민구 교수의 저서 [한국의 옛 조형의 미] #김유신장군묘 신라 왕릉 탐방에서 김유신장군묘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흥무대왕으로 추존도 되었고, 진위 여부를 떠나 능의 규모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장군(595~673)의 묘로 알려져 있다.  왕릉은 신라 역대 왕릉 또는 귀족들 묘보다 넓게 면적을 차지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김유신장군의 묘 앞에는 동서로 두 개의 비석이 마주 보고 있다 김유신장군이 돌아가시자 문무왕은 예를 극진히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묘비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그 묘비는 전하지 않고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두 기의 묘비는 후대에 세운 비석이다 서쪽에 보이는 비석은 비문과 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앞면에는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 조선 중엽에 세워졌으며, 동편의 묘비는 1970년대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렬흥무왕릉)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비가 오면 동편 비의 '능(陵)'자가 '묘(墓)' 자로 겹쳐 보인다고 한다. 누군가 이곳이 능이 아닌 묘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무덤의 주인의 지위에 따라 무덤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릉(陵) : 왕과 왕비(추존된 경우도 포함)의 무덤 묘(墓) : 대군이나 공주.후궁, 일반인 등의 무덤. 신라 김유신처럼 왕이 아닌 경우는 '묘' 라 부른다 묘 탱석에는 십이지신상을 부조하였는데 이는 8세기 후반과 9세기의 형식으로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무덤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기도 하다. 신라 왕릉에서 12지상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8세기 중엽 33대 성덕왕릉부터이며, 이후 55대 경애왕릉까지 23기의 왕릉 중에서 12지상이 발견된 곳은 9곳으로, 성덕왕릉, 원성왕릉(괘릉), 경덕왕릉, 진덕여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김유신장군묘, 구정동 방형분, 능지탑 등이 있다. 무덤 주변에서 곱돌로 된 말,돼지,토끼의 십이지신상이 출토되었는데, 말과 토끼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돼지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같이 있으면 조으련만 이렇게 따로 보관하는 것인지 능 조성 당시에는 무열왕릉과 같은 호석 구조였으나, 42대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증 시호를 내린 직후 또는 36대 혜공왕 때 개수한 것으로도 추정한다. 그렇다고 직계 조상인 무열왕릉은 두고 김유신장군묘만 화려하게 개수했다는 것도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현 무열왕릉 앞 김인문묘가 김유신묘라는 주장과 함께 이곳은 경덕왕릉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유신장군은 삼국 통일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삼국사기 인물 열전의 제일 앞에 있으며, 무려 분량이 10권의 열전 중에 3권이나 되는 량이다. 경주 김씨인 김부식의 사심이 가득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 가야와 신라의 왕족 반반이라 할 수 있는 출신으로, 진평왕 대에서부터 문무왕 대까지 5대의 임금님을 모시고 삼국통일로 가는 과정에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신라의 가장 위대한 장군이다. 남산 통일전에 삼국통일의 3대 영웅호걸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장군 3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김유신장군의 동상이 경주 황성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돌방무덤공개석실고분 김유신장군묘 순환도로는 봄이면 벚꽃으로, 가을이면 단풍으로 정말 걷기 좋은 아름다운 길인데, 중간지점에 돌방무덤이 하나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이렇게 돌방무덤 형태를 이룬다고 한다. 이렇게 무덤의 형태를 공개해 두어서 이해에 도움이 되는 듯하다. 신라의 한 무덤 형태를 볼 수 있는 유익한 공간이기도 하다. 낙엽마저 다 떨어진 흘무로 벚꽃길을 지나, 겨울바람 세차게 불어오는 서천뚝방길을 지나간다. 뚝방길에서 동쪽은 남산이 서쪽은 선도산이 보이고, 선도산 아래로 고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서천 뚝방길이 금계국 꽃길이라고 한다. 길에도 금계국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내년에 함 와야겠다.  #서악서원  #신라문화원 #선도산고분군 서악서원을 지나 올라보면 고분군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경주 시내를 바라보거나 무열왕릉과 서악동고분군을 바라보는 경관은 정말 아름답다. 서악마을은 신라문화원의 문화재돌봄사업단의 다양한 사업으로 마을 일대가 깔끔하게 정비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문화유산으로 인한 개인 사유재산 활용 등에 제약이 많았을 텐데, 신라문화원의 혁신적인 구상을 바탕으로 정비사업을 통해서 개선한 가장 모범적인 마을이라 하겠다. 서악동 삼층석탑과 함께 경주에서 가장 멋진 마을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봄이면 작약꽃이 가을이면 구절초가 만발하여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서악마을 정비 사업 전에 대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수십개의 고분군이 본 모습을 나타났는데 선도산고분군 이다. 왕릉급으로 추정되는 서악동고분군의 배장으로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라 왕경 서편인 선도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상의 말단부에 4분의 왕릉이 비정되어 있다. 위에서 아래로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 46대 문성왕릉, 47대 헌안왕릉이 순서대로 위치해 있다. 조선 영조 6년에 비정되어 현재 시적지로 지정되어 있다고는 하나, 실제 왕릉으로 보기 어렵고, 아래 서악동고분군이 왕릉으로 추정되는 공간이다.  #진흥왕릉 (24대 진흥왕) 맨 먼저 만나는 임금님은 24대 진흥왕릉 이시다. 진흥왕의 업적에 비하면 왕릉이 너무 초라한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이 먼저 든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아우 김입종의 아들이며, 7살이 되던 해에 왕위에 올랐다. 화랑의 시초가 되는 선화와 원화제도를 도입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어린 진흥왕을 대신해 섭정을 하였던 지소태후에 의해 불교 발전은 왕실이 이끌게 되고, 호국불교로 발전하게 된다. 황룡사를 세운 시기도 이때이다. 또한 신라의 영토가 크게 넓어져 가야 땅을 모두 병합하고, 한강 지역을 점하였다. 현재의 능은 삼국사기 장지로 기로된 '영경사북봉' 과 동남쪽 아래에 있는 서악동 삼층석탑을 근거로 조선 영조 6년에 김씨 문중에 의해 진지왕릉과 함께 지정되었다. 영경사터로 추정된 서악동 삼층석탑의 탑 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진흥, 진지왕릉이 조영된 6세기가 아니라 9세기 후반의 사찰로 보고 있어 잘못된 왕릉 비정이란 지적이 있다.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으로 경주김씨 문중에 의해 진흥왕릉 부터 일렬로 일가의 왕릉을 줄 세우기 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진지왕릉 (25대 진지왕) 25대 진지왕은 24대 진흥왕의 차남으로 왕위를 이었으나, 허수아비 왕으로 타락한 삶을 살다가 폐위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즉위 후 왕권은 사도태후와 미실에게 있었고, 왕권을 상실한 진지왕은 정사에는 안중이 없고, 애첩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였다. 진지왕의 색욕은 궁궐에 한정되지 않고 민가의 아낙과 소녀까지 가리지 않고 관계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다 결국 사도태후와 미실에 의해 폐위된다. 진지왕의 손자가 무열왕 김춘추 이다. 능은 진흥왕릉 10m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폐위된 왕은 진골에서 성골로 강등되었지만, 이러한 위치에 왕릉이 조성되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문성왕릉 (46대 문성왕) 조금 더 아래로 내려오면 46대 문성왕릉 이 있다. 문성왕은 44대 민애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45대 신무왕의 장남이다. 신무왕은 6개월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에 종기를 앓다가 죽었는데, 당시 반정에 공을 세운 장보고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였다.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맞이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유언으로 남겼는데, 문성왕이 약속을 지키려 하자 평문 출신의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 할 수 없다는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고, 결국 포기하게 된다. 이로 인해 장보고와의 관계가 나빠지고, 장보고는 부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함으로써 청해진이라는 해상권력을 잃게 되기도 한다. 문성왕의 후손이 신라의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이 된다. 현재의 능은 조선시대 이래 서악동 선도산 일원을 '산작지'라 불렀는데, 이를 문성왕, 헌안왕의 장지인 '공작지'와 동일시한 까닭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영조 6년에 김씨 문중에 의해 헌안왕릉과 함께 지정되었다. 동남산 현재 헌강왕릉 정강왕릉 자리가 문성왕릉과 헌안왕릉이라는 주장도 있다.  #헌안왕릉 (47대 헌안왕)3 47대 헌안왕은 45대 신무왕의 아버지 균정의 아들이므로 문성왕의 숙부가 된다. 그런데 문성왕에게는 손자가 있었는데 불구하고, 노쇠한 숙부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은 납득이 잘 안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는 문성왕의 유언을 필요 이상 길게 남겨두었는데 정파 간의 모종의 결탁이 있었다고 할 만하다. 헌안왕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둘째가 태봉의 궁예라는 이야기가 있다. 헌안왕릉 옆에는 조선시대 양반의 무덤이 왕릉을 침범하여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이 왕릉일까 싶다.  #서악동삼층석탑  모전석탑의 형식으로 남산의 용장계 지곡 삼층석탑과 남산동 삼층석탑(동탑)과 닮았다. 탑신석의 금강역사상이 햇살을 받으며 어린아이 웃음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듯 보인다.  장난치듯,  우측 금강역사는 근무 중에 나 잠시 놀러 갔다 오께 하는 듯하고, 좌측 금강역사는 금강저를 손에 잡고 안돼 어디가 하며 소리치는 듯하다.  ㅋ #보희의꿈 '어느 날 문희(김유신의 동생)의 언니 보희가 서악(西岳)에 올라가 오줌을 누웠는데, 경성(서라벌)에 가득 찼다'라는 꿈을 꾸었고, 동생인 문희가 언니 보희의 꿈을 싸서 김춘추의 옷고름을 꿰매준 인연으로 왕비가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김유신의 의도된 계획이었다는 추정도 가능한데, 그 꿈과 관련된 연못이 샛골못(보희연못)이 있다. 보희도 나중에 김춘추의 후궁이 된다.(화랑세기) 연못 옆으로 서악동고분군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는데, 이제는 자물쇠로 잠가버렸다.  탐방객의 동선을 고려하여 들어가도록 하고, 나가면서 입구에서 표를 발급받도록 하면 안 될까 싶다.  탐방객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다.   무열왕릉과 서악동고분군을 만나기 위해 내려가서 다시 올라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서악동고분군 5세기말 6세기초에 이르러 왕경의 발달로 인하여 경주분지 내 평원에서 무덤을 조성하던 적석목관분 시대를 마감한 후 왕릉이 최초로 미련한 곳이 선도산이다. 왕성인 월성과 왕릉군은 동서방향으로 놓여 있으며, 거리는 3.3km 이다. 왕릉급 무덤임에도 피장자가 비정되지 않은 서악동고분군에 대해 추사 김정희에서부터 최근 왕릉을 연구하는 학자분들까지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다. (참고 : 대구은행 발행 신라왕릉 책자의 '신라왕릉 주인공 비정에 관한 몇가지 논쟁' : 글_박광열-성림문화재연구원 원장) 분명한 건 법흥왕, 진흥왕,진지왕은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  금 비정되어 있는 왕릉은 귀족의 무덤일 것으로 보인다.  작년 힌남노 태풍으로 훼손된 4호분에 현재 복구공사가 한창이다.  작년 태풍으로 인한 복구공사인데 긴급복구공사라고 달린 현수막 보며 한번 웃었다.  긴급이 이런 말이구나 하고. ㅋ #무열왕릉  제29대 태종무열왕은 이름은 춘추이고, 진지왕의 장남 김용수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장녀 천명공주 소생이다. 603년 태어났으며, 아버지 용수가 죽은 뒤에는 어머니 천명부인이 삼촌 용춘에게 재가하였기에 용춘의 양자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용수와 용춘을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24세 되던 해에 화랑 풍월주가 되었다.(화랑세기) 진평왕, 선덕.진덕여왕 대의 정치 및 외교 문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화랑도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유신 등의 가야파 군벌과 손을 잡고 막강한 힘을 형성하여, 진덕여왕이 죽자, 5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김춘추는 폐왕 진지왕의 손자로 왕위계승이 쉽지않는 상황이었으나, 상대등 알천의 추천과 김유신의 지지로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왕위에 올랐다. 성골로 이어지던 신라왕조는 무열왕을 기점으로 진골 임금으로 변화한다. 660년 당의 소정방이 이끄는 13만의 병사과 함께 나당연합군을 결성하고, 황산벌의 마지막 결투를 승리하고 백제를 멸망시킨다. 의자왕의 항복에 사비성으로 입성하게 된다. 삼국통일을 보지는 못하고, 백제부흥운동과 고구려, 당나라까지의 정리는 아들 문무왕에게 물려주고 661년 죽었다.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는 저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다른 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 백제를 없앤 김춘추”를 가리켜 “역사의 죄인”이라 하며 사대주의자라 비판하였다.  “다른 종족을 불러들여 동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당의 군대를 끌어들여 고구려의 고토 우리의 영토가 줄었다며 신라에 의한 통일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당시 신라, 고구려, 백제가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이 있었을까.  당, 왜, 말갈 등 주변 국들과 같이 그냥 적국이지 않았을까. ? 신라의 통일은 진정한 통일이 아니다, 통일신라라는 표현 보다 후기신라라 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이 맞는 표현인지 아직 판단하지는 못하겠지만,  신라의 통일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그 중심에 김춘추와 김유신이 있다.  이 곳은 무열왕릉비로 인해 왕릉의 이름이 가장 정확한 왕릉이라 할 수 있다. 무열왕릉 앞에는 무열왕 김춘추와 문명왕후 문희의 사랑을 확인시켜주려는 듯 팽나무와 말채나무 아래 밑둥 부분이 붙어 자라다 다시 각자 자라는 연리지가 있다. 무열왕릉 앞은 상석은 신라 때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상석이라고 한다. 이후 왕릉에는 탁자형의 상석이 나타나게 된다.   #무열왕릉비 왕릉 주변에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귀부)과 비석 위에 올리는 머릿돌(이수)이 있는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석은 사라졌지만 귀부와 이수 조각의 아름다움은 그 어느 것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신라에서 묘호(태종)를 최초로 사용한 임금님이기도 하다. 당나라의 항의가 있었지만, 문무왕은 굴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첨성대를 기준으로 볼 때 비슷한 거리에 삼국 통일을 위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3명의 영웅들이 자리하고 있다 김유신장군묘와 무열왕릉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고, 선덕여왕릉은 일직선상에 있다. #김인문묘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이다.  당에서 신라 외교관 역할에 충실했으며,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 패망에 역할을 했다.  당에서 여생을 마쳤고, 효소왕 때에 유해를 신라로 호송하였다.  무열왕릉 주차장 주변에 능이 2개와 비각이 있다. 하나는 김인문묘이고 하나는 김양묘로 비정되어 있다.  #김양묘 김양은 무열왕의 9세손으로 어떻게 이 자리에 묘가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없지만, 김인문 묘 옆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지난번 다녀온 민애왕릉의 몰아내는 역할을 했던 신하였고, 뒤를 이은 신무왕, 문성왕 대의 귀족이다 보니, 이곳에 묻혀 있는 듯하다. 신하가 죽으면 모셨던 왕의 무덤 아래 무덤을 쓰던 배장이란 풍습이 있었다. #서악동귀부 묘지 옆 태종무열왕릉비와 비슷한 모양의 거북 모양의 귀부가 있는데, 주변 서악서원에서 김인문 묘비가 발견되었고, 거리가 있지만 김인문 묘비와 비각을 같은 것으로 보고 김인문 묘로 비정되는데 영향을 미쳤다.  김인문묘가 김유신장군묘이고, 옆의 김양묘가 김인문묘라는 주장도 있다. 김유신장군이 돌아가시자 문무왕은 예를 극진히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묘비를 세우게 하였다고 전한다.  만약 이 주변에서 김유신의 묘비가 발견되었다면 묘 비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김인문 묘비는 경주박물관에 있다. 무열왕릉 주차장에서 효현동삼층석탑, 법흥왕릉 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한다. [ 2023 신라왕경 길을 걷다 3/5 #2 (법흥왕릉) ] #효현동삼층석탑 석탑으로 인해 이곳을 애공사지로 보고 법흥왕릉을 비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법흥왕릉 (23대 법흥왕) 23대 법흥왕은 22대 지증왕의 장남으로 키가 7척이고, 성품이 관대하여 사람들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신라의 국력을 신장시킨 업적으로 500년간 이어온 가야 왕조를 폐하고 병합한 것(삼국사기)과 불교의 공인이다.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는 진흥왕 때에 금관가야가 항복한 것으로 전하여 차이가 좀 있다. 19대 눌지왕 때에 인도 승려 묵호자가 신라에 불교를 전한 후로 21대 소지왕 때 다시 아도화상이 들어와 불법을 퍼뜨렸다. 당시 불교에 대한 반대가 심하였고,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에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다. 이차돈은 왕과 가까운 신하로 "도를 이루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는 말을 전하며 자신의 목을 베어 불교 반대 여론을 꺾어버리라고 하였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은 벤 자리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고, 그 색깔이 젖빛처럼 흰빛이었다. 이로 인해 다음 해인 528년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고, 신라인들은 불법을 만나게 되었다. 현재의 왕릉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애공사북봉'과 동편의 효현동 삼층석탑을 근거로 이 절터를 애공사로 보고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 지정되었다. 서악동고분군 중 한곳이 법흥왕릉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더 타당성이 높아 보인다. 왕릉 입구 농로에 논 주인께서 적어둔 표지가 이채롭다. 쓰레기 버리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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