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2/5 서남산 삼릉가는길, 내남권역

[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2/5 #1 경애왕릉,삼릉,지마왕릉,일성왕릉,오릉(혁거세,남해,유리,파사) ] ■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왕릉탐방 2/5 경애왕릉, 삼릉(아달라왕릉,신덕왕릉,경명왕릉), 지마왕릉, 일성왕릉, 오릉(혁거세왕릉,알영왕비릉,남해왕릉,유리왕릉,파사왕릉), 경덕왕릉, 희강왕릉, 민애왕릉 ▶ 탐방일자 : 2023.11.26(일) ▶ 날씨 : 맑음, 미세먼지 : 보통 ​ +----------☆----------○-----------◎----------◇----------□----------+ ▶ 코스1 : 삼릉숲 입구 -> 55대 경애왕릉 -> 삼릉(8대 아달라왕릉,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 -> 망월사 연화탑 ->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 삼불사 -> 태진지 -> 6대 지마왕릉 -> 포석정 -> 창림사지 -> 남간사지 당간지주 -> 7대 일성왕릉 -> 육부전 -> 나정 -> 식혜곡 석조유구 -> 오릉(1대 혁거세왕릉, 2대 남해왕릉, 3대 유리왕릉, 5대 파사왕릉, 알영왕비릉) -> 오릉 주차장 ▶ 거리 및 시간 : 11.3km, 4시간 ▶ GPS Log - Ramblr(램블러) Trip : http://rblr.co/onA3q +----------☆----------○-----------◎----------◇----------□----------+ ▶ 코스2 : 오릉 주차장 -> 차량이동(내남면 부지리) -> 35대 경덕왕릉 -> 차량이동(내남면 망성리) -> 43대 희강왕릉 -> 44대 민애왕릉 ▶ 거리 및 시간 : 2km, 1시간 ▶ GPS Log - Ramblr(램블러) Trip : http://rblr.co/onA3z +----------☆----------○-----------◎----------◇----------□----------+ ※ '신라왕릉' 네이버 지도 저장(즐겨찾기) 기능 이용하기 https://naver.me/xecn79Pc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탐방에 대한 생각은 다른 글에 남긴다. #경주남산왕릉탐방 #신라왕릉가는길 #신라왕릉길을걷다 #경주왕릉 #신라왕릉 #왕릉탐방 https://blog.naver.com/kimbak65/223266819863 +----------☆----------○-----------◎----------◇----------□----------+ ■ 탐방 후기 #경주 #경주남산 #세계문화유산 #경주남산문화유산탐방 #경주문화유산탐방 #문화유산탐방 #문화유산탐방산행 서남산 삼릉가는길을 걷고, 내남권역의 왕릉 3곳은 차량으로 이동하는 탐방길이다. 이 길은 신라 박씨 왕 10명의 모두를 만날 수 있다. 문헌 상의 기록은 개무시하고 조선 영조 6년에 김씨와 왕릉 농갈라 먹기를 통해 서남산을 할애받아 무작위로 박씨 10명 모두 왕릉을 비정했다. 서남산에 박씨 릉이 박씨 조상이 아님이 분명한데 재를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애왕릉 (55대 경애왕) 삼릉에 있는 53대 신덕왕의 아들로 박씨의 마지막 왕이며 견훤에게 죽임(자결)을 당한 비운의 왕이다. 효공왕 이후 새로 시작된 3명의 박씨 왕조를 끝나고, 견훤에 의해 다음 왕으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씨 56대 경순왕이 시작되었다. 고려의 왕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견훤의 공격에 대비하여 포석정에서 제를 올리다가 최후를 맞이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배풀었다고 되어 있으나, 음력 11월 추운 겨울 날에 적군이 처들어오는 와중에 연회를 배풀었다는 것은 신라 패망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한 김부식의 조작과 친일사학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포석정 방문자센터 내부 안내판에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 먹고 놀다 신라를 망쳤다' 라는 일제의 신민사관에 의한 왜곡을 한심하게도 그대로 받아 적고 있다. 견훤이 영천까지 와서 위협하는 시기에 경애왕이 음력 11월에 추운 겨울날에 야외에서 술 먹고 놀았다는 이야기도 현실성이 없다. 왕이 백성을 외면하고 술 먹고 놀다가 나라 망한 민족이니,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대일항쟁기(일제감점기) 일제 사학자들의 왜곡된 주장 일 뿐이다. ​ 왕릉은 해목령에 모셨다고 되어 있으나, 해목령 주변에 발견된 릉은 없고, 아래에 일성왕릉이 경애왕릉이라는 주장이 있다.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삼릉 3기의 왕릉이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동쪽에서부터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릉, 그리고 54대 경명왕릉이 있다. 아달라왕과 신덕왕과 720여년이 차이가 나는데도 당시 박씨 일족에 의해 비정되었다. 우후죽순처럼 하늘로 자유자재로 자란 소나무숲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왕릉 비정의 스토리는 아름답지 못한 곳이다. 입구 삼릉 안내석에는 서쪽에 아달라왕릉이 안내하고, 삼릉 안내판에는 서쪽에 경덕왕릉이라 안내한다. 입구 안내석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아달라왕릉 (8대 아달라왕) 잠시 후에 만날 6대 지마왕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도 아달라왕 13년에 정월 초하루 날에 개기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 연오랑 세오녀의 설화와도 관련이 있다. 당시의 이러한 일식 자연현상은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8대까지 대부분 박씨로 이어지던 신라왕조는 석씨에 의해서 아달라왕은 제거되고, 석씨 9대 벌휴왕의 시대로 이어진다. 조선 영조 6년에 장지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지만 박씨 문중에 의해 임의로 비정되었다. #신덕왕릉 (53대 신덕왕) 지난주 탐방한 김씨 52대 효공왕을 제거하고, 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으로 박씨 왕조의 부활을 시작한 왕이다. 17대 내물왕으로 시작된 김씨 왕조는 박씨들에 의해 52대 효공왕을 몰아내고 560년간의 김씨왕조를 끝내버렸다. 박씨 왕조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신덩왕은 화장하였고 능은 죽성에 마련하였다고 기록이 있으나, 이렇게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죽성이 남산인건가? #경명왕릉 (54대 경명왕) 후삼국시대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왕건이 태봉의 궁예를 물러내고 고려를 창업한 시기이기도 하다. 후백제의 견훤의 공격에 대비해 왕건에게 군사 요청을 하면서 신라의 호족들은 왕건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시기, 혼란의 정국 말기에 쇠락한 신라를 유지하기 위해 고려에 위탁했던 시기인데 그도 오래 살지 못했다.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 후 뼈는 성등 야산 서쪽에 뿌렸다 전해지지만 위치와 상관없이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흔히 배리삼존불로 불리는 곳이다. 불상을 보호한다고 세운 보호각으로 인해, 햇빛을 받지 못한 불상의 자연미는 사라져 아름다운 미소는 사라지고, 석재에 이끼만 가득하고, 표면은 아파하고 있다. 보호각을 철거하던지, 비취 된 엽서의 미소를 찾을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길 바래본다. 동지가 다가와서 부처님 전에 쌀과 팥을 올렸다. #지마왕릉 (6대 지마왕) 5대 파사왕의 아들로 국내 정세는 안정되었지만 왜와 가야, 말갈 등의 침공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외교 능력을 시험 받았던 시기이다. 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성왕릉과 같이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임의로 비정되었다. #포석정 신라의 패망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포석사라는 기와편이 발견되었는데, 사찰이 아니라 제당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포석정지 방문자센터 내의 안내에는 단순히 술먹고 놀았던 장소로 희화화 하고 있다. 천년의 신라에서 경주남산이 가진 신성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이곳에서 술 먹고 놀고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성한 부처님의 땅으로 여기며, 오악 중 남악으로 남악신에게 제를 올리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뒷편 개울에는 1명이 들어갈 정도의 홈이 있는데, 이곳은 아마도 제사장이 제를 올리기 전에 목욕제계를 한 공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창림사지삼층석탑 창림사지는 신라 초기 왕궁터로도 알려져 있다. 왕궁터 이후 창림사지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는데, 발견된 문화유산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이다. 삼층석탑의 아수라가 언제나 눈에 먼저 들어온다. #창림사지쌍귀부 탑 주변으로 일부 석재들은 위치 그대로 볼 수 있는데, 발굴 후 주변을 탐방하기 어렵지 않았는데, 지금은 풀숲에 갇혀있어 쌍귀부로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파손이 심한 쌍귀부이지만 마주보는 도톰한 앞발 두개가 귀여워 보인다. #남간사지당간지주 당간지주 상부에 십자모양이 눈에 간다. 어떤 분의 블로그 글을 읽다가 이 모양이 통일신라 때의 기독교 전파된 흔적이 아닐가 추정하는 글을 보았다. 아마도 이건 그냥 모양을 만들면서 생긴 우연이 아날가 싶은데 과거의 유물을 보면서 이러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재미이기도 한 듯하다. #일성왕릉 (7대 일성왕) 제3대 유리왕의 적장자로 알려져 있는데, 유리왕의 사후 77년이나 지난 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이라, 일성의 자손이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3대 유리왕 사후 너무 어린 나이로 당시 세력을 장악한 4대 탈해가 왕이 되었다. 그 이후 4대 탈해왕도 후사가 없었고, 태자였던 김알지가 왕위를 양보하여, 3대 유리왕의 둘째 아들인 5대 파사(일성왕의 동생)가 먼저 왕위에 오르고, 파사의 장자인 6대 지마왕 이후에 왕위에 오르게 된 경우이다. ​ 일성왕은 장지 기록이 없으나, 조선 영조 6년에 박씨 문중에 의해 서남산 지역의 왕릉이 일괄적으로 비정했는데, 아마도 조선 양반의 유교적 사고로 3대 유리왕의 장자라는 측면에서 오릉에서 가까운 순으로 6대 지마왕보다 7대 일성왕릉으로 비정된 듯 하다는 의견이 있다. 이곳은 장지 기록이 해목령 아래라고 하는 55대 경애왕릉이란 주장이 더 합리적이다. 왕릉으로 들어가는 길목 좌측에 소나무 숲속에는 신라왕릉 연구에 큰 성과를 냈지만,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故 이근직 교수 수목장과 추모석이 있다. 돌에는 ‘新羅王陵을 연구하던 神遊林을 기리미’라고 조각되어 있다. #육부전 매번 문이 잠겨 담너머로만 내부를 잠시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잠시 문으로 출입하는 분이 있어 양해를 구하고 육부촌 촌장님께 인사드릴 수 있었다. 육부전의 문이 6개 일 듯한데, 왜 5개 일까? #나정 경주나정 발굴을 통해서 팔각형의 건물터와 타원형 우물터가 확인되었다. 팔각형의 건물은 시조가 태어난 곳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제사 시설인 ‘신궁’의 터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최근 팔각건물지 기단을 복원하였다. 구재로 보이는 모서리 석재 2개와 기단석 1개 이외에는 모두 신재로 되어 있다. 최근 기단 복원이 된 곳에는 사천왕사지 서목탑지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제21대 소지 마립간이 시조가 태어난 곳인 나을(羅乙)에 신궁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시조는 박혁거세 이므로, 나을은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나정(羅井)이라고 볼 수 있고, 2대 왕인 남해 차차웅은 이곳에 시조묘를 세웠었다고 한다. ​ 나정은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강지로 전해오는 곳이며 1803년 순조 3년에 시조왕의 내력을 기록한 유허비와 비각이 있다. #식혜곡석조유구 (구)오릉초등학교 내부에 식혜곡에서 발견된 석조유구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오릉 오릉은 1970년도 경주유적지 정비사업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관삼 사항이기도 했으며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오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경주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역으로 생각하면 경주 톨게이트 위치 선정에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까 싶기도. ? ​ 오릉의 피장자는 1세기와 2세기초에 재위했던 ①신라 시조 1대 혁거세왕, ②알영부인, ③2대 남해왕, ④3대 유리왕, ⑤5대 파사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특정 고분을 누구의 능인 지는 지정하지 않았다. 서쪽의 제1호분이라 불리우는 능의 규모가 가장 큰데 나머지 능은 그 규모가 적어서 왕능인지 의심이 들기에 충분하다. ​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기이편에 의거하여 통일신라 중대 이후부터 사릉이라는 능호와 함께 5명의 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릉 안에는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인 알영정과 조선 세종 11년에 세어진 박씨 재실인 숭덕전이 있다. 대릉원도 무료입장인데, 오릉은 아직 유료입장이다. 신라왕릉 중에 유료로 입장해야 하는 두곳(천마총, 오릉) 중 하나 이유가 뭘까..? #혁거세왕릉 (1대 혁거세왕) '삼국사기'에는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뤘는데, 이것이 진한의 6부라고 하면서, 이 진한의 6부가 곧 신라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조선은 고조선을 이야기한다. 혁거세의 등장은 신화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와 유사의 기록에 차이가 있다. ​ '삼국사기'에는 6부촌 중에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에서 알을 발견하여 그 속에서 나온 혁거세를 키웠다고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마을 촌장들이 함께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분명한 것은 혁거세가 양산촌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영부인은 고허촌 출신이다. 양산촌 출신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는 과정에 고허촌이 적극 지지하므로써 그 공로로 알영이 왕비가 된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전한다. 나라를 다스린 61년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고,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큰 뱀이 나와서 못 하도록 방해를 하므로 다섯 동강 난 몽뚱이를 다섯 능에 각각 장사하고 이릉을 '사릉'이라 하니,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혁거세의 죽음이 평범하지만은 않았다는 추측 정도는 가능해 보인다. #남해왕릉 (2대 남해왕) 남해왕은 혁거세의 둘째아들로 '삼국사기'에 남해왕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두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 혁거세의 죽음이 반란에 의한 죽음이었고, 남해왕이 그 반란을 수습하는데 공이 많아 백성들에 의해 왕에 추대된 것이라 추측 할 수 있다. 남해왕 대에 이러한 혼란 속에 왕은 현명하고 용맹하다는 소문이 돌았던 석탈해(4대 탈해왕)를 불러 딸과 혼인시키고 대보에 임명했다. 남해왕은 차차웅이라 불리었는데, '화랑세기'에는 이는 무당이란 뜻으로, 제사장을 겸한 왕이라고 전하고 있다. #유리왕릉 (3대 유리왕) 유리왕은 남해왕의 태자인데, '삼국유사'에는 그를 '노례왕' 또는 '유례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14대 유례왕이 있어서 아마도 이름이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정리가 된 듯. 남해왕이 태자인 유리와 사위인 탈해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탈해는 왕위를 양보하였다, 탈해는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면서 떡을 깨물어 이의 수를 세어 보았고, 유리가 이 수가 더 많자 유리를 받들었다. 그 후로 '잇자국' 이라는 뜻의 '이사금'을 왕호로 하였다고 전한다. 이사금이 차츰 변하여 임금으로 불리게 되었다. #파사왕릉 (5대 파사왕) '삼국사기'에는 4대 탈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신하들이 3대 유리왕의 태자 일성(7대 일성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으나, 누군가 일성이 적자이긴 하나 파사(유리왕의 차남) 만큼 총명하지 못하다 하여 신하들이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당시의 세력을 쥐고 있었던 탈해 세력의 지지와 김알지의 손녀와 결혼하여 김알지계 세력의 지지를 한꺼번에 받았지 않았나 본다. #알영왕비릉 '삼국사기'에는 알영정(閼英井)가에 용(또는 鷄龍)이 나타나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고 갔다. 여자아이는 입술이 닭부리와 닮아 월성 북쪽 천(北川)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니 부리가 퉁겨져 떨어져서 발천이라고도 하였다고 전한다.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하였고, 용모와 인품이 뛰어나 박혁거세의 비가 되어 백성들에게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렸다. 라고 전한다. 최근 월성 북쪽 천이라고 알려진 알영왕비와 관련된 발천에 대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차량으로 내남면 부지리 경덕왕릉으로 이동한다. #경덕왕릉 (35대 경덕왕) 35대 경덕왕은 34대 성덕왕의 아들로 유학 사상에 입각한 전제왕권 정치를 꿈꾸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화 시킨 왕으로 전해진다. 월정교와 춘양교를 세웠고, 불국사, 석굴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 경덕왕의 생식기 길이가 8치(24센티미터)나 될 정도로 정력이 왕성해 보이는 왕이였지만 자식 복은 없었나 보다.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들어가는 길의 소나무숲 길이 정감있는 길이기도하며, 봄에 진달래꽃이 필 때 쯤 오면 더욱 좋기도 하다. 신라 왕릉 중에서 십이지신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34대 성덕왕릉인데, 그곳은 환조의 형태로 나타내었고, 호석에 부조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십이지상이 시원은 중국 당대로 알려져 있으나, 동아시아에 무덤의 호석에 십이지상을 표현한 경우는 통일신라뿐이라고 하니 독창적인 무덤 형태이다. 십이지는 방위의 개념도 있지만, 무복을 입은 형태의 십이지는 무덤을 호위하는 신장상의 의미가 있는 듯 하다. ​ 다시 차량을 이용하여 내남면 망성리로 이동(10분)하여 통일신라 후기 비운이 왕 2분을 만난다. 명색이 왕릉인데 주변에 주차할 공간조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고, 왕릉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는 개인집 담벼락에 붙어있다. 비운의 왕을 만나는 왕릉 탐방길이 실감 난다. #희강왕릉 (43대 희강왕) 42대 흥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신라 왕족들 간의 처절한 권력 암투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44대 김명(민애왕)과 함께 왕권을 잡았지만, 정치적 동지였던 민애왕의 반란으로 자진한 불운의 임금이었다. ​ 왕릉이라 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고, 민묘처럼 보여, 왕릉이 아닌 묘로 추정하기도 한다. 반란으로 자진한 왕이긴 하지만, 전대 왕인 흥덕왕릉에 비히면 너무나 초라하고 규모 면에서도 왕릉이라 하기에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는 곳이다. 왕릉의 위치라 하기에 부족함이 넘치는 비탈지고 경사진 곳에 평탄작업 없이 그대로 왕릉을 조성하였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곳의 왕릉 비정이 무리가 있는 것 아닌가 한다. 서악권역의 진흥왕릉이나 진지왕릉도 마찬가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 소산에 장사지냈다는기록이 있고,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서 비정되었다. #민애왕릉 (44대 민애왕) 43대 희강왕을 옹립했던 김명이 다시 왕을 시해(자진)하고 본인이 왕이 되었는데 44대 민애왕이다. 하지만 그도 얼마 있지 않아 해상왕 장보고 등의 세력의 힘을 빌린 45대 신무왕 의해 시해 되었다. 이러한 이어지는 왕권 다툼은 신라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역사이기도 하다. 신라사회는 35대 경덕왕까지 약간의 권력다툼이 있었지만, 화백제도의 민주적 절차에 따라 순리에 의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36대 혜공왕부터 마지막 1백70년 동안 21명의 왕들은 힘센 놈이 죽이고 죽이는 쿠테타 왕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능의 받침돌이 신문왕릉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 1984년 발굴을 진행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최근 다시 발굴을 진행하였다. 장보고에 패한 후 왕의 예로 장례 지냈다는 기록만 있고, 위치가 없는데,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현재 구정동 방형분을 민애왕릉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 ■ 탐방 참고사항 ▶ 주차 : 왕릉탐방은 걷기로만 이루어지지 않아 차량이동도 포함됩니다. 1코스는 오릉주차장(1천원), 서남산주차장(2천원) 유로주차장을 이용합니다. 2코스는 경덕왕릉주차장 이용 가능하지만, 민애,희강왕릉은 주차장이 따로 없으므로 주변 저수지 갓길을 이용 ▶ 식수 : 식수는 중간 보충 가능 ▶ 화장실 : 화장실은 탐방로에 여러 곳(서남산주차장,삼불사,포석정,오릉 등) 이용 가능 ▶ 기타 : 민애.희강왕릉 탐방시 주차에 유의 필요, 마을 안에는 주차공간이 없으므로 입구 저수지 주변 주차후 이동 ▣ 청월의 산행일기 & 문화유산 탐방기(블로그) : https://blog.naver.com/kimbak65 #ramblr #램블러 #산은주인이고우리는손님이다 #경주남산한걸음더들어가기 [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2/5 #2 (내남권역-경덕왕릉, 희강왕릉, 민애왕릉) ] ■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왕릉탐방 2/5 경애왕릉, 삼릉(아달라왕릉,신덕왕릉,경명왕릉), 지마왕릉, 일성왕릉, 오릉(혁거세왕릉,알영왕비릉,남해왕릉,유리왕릉,파사왕릉), 경덕왕릉, 희강왕릉, 민애왕릉 ▶ 탐방일자 : 2023.11.26(일) ▶ 날씨 : 맑음, 미세먼지 : 보통 ​ +----------☆----------○-----------◎----------◇----------□----------+ ▶ 코스1 : 삼릉숲 입구 -> 55대 경애왕릉 -> 삼릉(8대 아달라왕릉,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 -> 망월사 연화탑 ->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 삼불사 -> 태진지 -> 6대 지마왕릉 -> 포석정 -> 창림사지 -> 남간사지 당간지주 -> 7대 일성왕릉 -> 육부전 -> 나정 -> 식혜곡 석조유구 -> 오릉(1대 혁거세왕릉, 2대 남해왕릉, 3대 유리왕릉, 5대 파사왕릉, 알영왕비릉) -> 오릉 주차장 ▶ 거리 및 시간 : 11.3km, 4시간 ▶ GPS Log - Ramblr(램블러) Trip : http://rblr.co/onA3q +----------☆----------○-----------◎----------◇----------□----------+ ▶ 코스2 : 오릉 주차장 -> 차량이동(내남면 부지리) -> 35대 경덕왕릉 -> 차량이동(내남면 망성리) -> 43대 희강왕릉 -> 44대 민애왕릉 ▶ 거리 및 시간 : 2km, 1시간 ▶ GPS Log - Ramblr(램블러) Trip : http://rblr.co/onA3z +----------☆----------○-----------◎----------◇----------□----------+ ※ '신라왕릉' 네이버 지도 저장(즐겨찾기) 기능 이용하기 https://naver.me/xecn79Pc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탐방에 대한 생각은 다른 글에 남긴다. #경주남산왕릉탐방 #신라왕릉가는길 #신라왕릉길을걷다 #경주왕릉 #신라왕릉 #왕릉탐방 https://blog.naver.com/kimbak65/223266819863 +----------☆----------○-----------◎----------◇----------□----------+ ■ 탐방 후기 #경주 #경주남산 #세계문화유산 #경주남산문화유산탐방 #경주문화유산탐방 #문화유산탐방 #문화유산탐방산행 서남산 삼릉가는길을 걷고, 내남권역의 왕릉 3곳은 차량으로 이동하는 탐방길이다. 이 길은 신라 박씨 왕 10명의 모두를 만날 수 있다. 문헌 상의 기록은 개무시하고 조선 영조 6년에 김씨와 왕릉 농갈라 먹기를 통해 서남산을 할애받아 무작위로 박씨 10명 모두 왕릉을 비정했다. 서남산에 박씨 릉이 박씨 조상이 아님이 분명한데 재를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애왕릉 (55대 경애왕) 삼릉에 있는 53대 신덕왕의 아들로 박씨의 마지막 왕이며 견훤에게 죽임(자결)을 당한 비운의 왕이다. 효공왕 이후 새로 시작된 3명의 박씨 왕조를 끝나고, 견훤에 의해 다음 왕으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씨 56대 경순왕이 시작되었다. 고려의 왕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견훤의 공격에 대비하여 포석정에서 제를 올리다가 최후를 맞이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배풀었다고 되어 있으나, 음력 11월 추운 겨울 날에 적군이 처들어오는 와중에 연회를 배풀었다는 것은 신라 패망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한 김부식의 조작과 친일사학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포석정 방문자센터 내부 안내판에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 먹고 놀다 신라를 망쳤다' 라는 일제의 신민사관에 의한 왜곡을 한심하게도 그대로 받아 적고 있다. 견훤이 영천까지 와서 위협하는 시기에 경애왕이 음력 11월에 추운 겨울날에 야외에서 술 먹고 놀았다는 이야기도 현실성이 없다. 왕이 백성을 외면하고 술 먹고 놀다가 나라 망한 민족이니,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대일항쟁기(일제감점기) 일제 사학자들의 왜곡된 주장 일 뿐이다. ​ 왕릉은 해목령에 모셨다고 되어 있으나, 해목령 주변에 발견된 릉은 없고, 아래에 일성왕릉이 경애왕릉이라는 주장이 있다.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삼릉 3기의 왕릉이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동쪽에서부터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릉, 그리고 54대 경명왕릉이 있다. 아달라왕과 신덕왕과 720여년이 차이가 나는데도 당시 박씨 일족에 의해 비정되었다. 우후죽순처럼 하늘로 자유자재로 자란 소나무숲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왕릉 비정의 스토리는 아름답지 못한 곳이다. 입구 삼릉 안내석에는 서쪽에 아달라왕릉이 안내하고, 삼릉 안내판에는 서쪽에 경덕왕릉이라 안내한다. 입구 안내석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아달라왕릉 (8대 아달라왕) 잠시 후에 만날 6대 지마왕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도 아달라왕 13년에 정월 초하루 날에 개기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 연오랑 세오녀의 설화와도 관련이 있다. 당시의 이러한 일식 자연현상은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8대까지 대부분 박씨로 이어지던 신라왕조는 석씨에 의해서 아달라왕은 제거되고, 석씨 9대 벌휴왕의 시대로 이어진다. 조선 영조 6년에 장지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지만 박씨 문중에 의해 임의로 비정되었다. #신덕왕릉 (53대 신덕왕) 지난주 탐방한 김씨 52대 효공왕을 제거하고, 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으로 박씨 왕조의 부활을 시작한 왕이다. 17대 내물왕으로 시작된 김씨 왕조는 박씨들에 의해 52대 효공왕을 몰아내고 560년간의 김씨왕조를 끝내버렸다. 박씨 왕조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신덩왕은 화장하였고 능은 죽성에 마련하였다고 기록이 있으나, 이렇게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죽성이 남산인건가? #경명왕릉 (54대 경명왕) 후삼국시대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왕건이 태봉의 궁예를 물러내고 고려를 창업한 시기이기도 하다. 후백제의 견훤의 공격에 대비해 왕건에게 군사 요청을 하면서 신라의 호족들은 왕건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시기, 혼란의 정국 말기에 쇠락한 신라를 유지하기 위해 고려에 위탁했던 시기인데 그도 오래 살지 못했다.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 후 뼈는 성등 야산 서쪽에 뿌렸다 전해지지만 위치와 상관없이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흔히 배리삼존불로 불리는 곳이다. 불상을 보호한다고 세운 보호각으로 인해, 햇빛을 받지 못한 불상의 자연미는 사라져 아름다운 미소는 사라지고, 석재에 이끼만 가득하고, 표면은 아파하고 있다. 보호각을 철거하던지, 비취 된 엽서의 미소를 찾을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길 바래본다. 동지가 다가와서 부처님 전에 쌀과 팥을 올렸다. #지마왕릉 (6대 지마왕) 5대 파사왕의 아들로 국내 정세는 안정되었지만 왜와 가야, 말갈 등의 침공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외교 능력을 시험 받았던 시기이다. 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성왕릉과 같이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임의로 비정되었다. #포석정 신라의 패망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포석사라는 기와편이 발견되었는데, 사찰이 아니라 제당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포석정지 방문자센터 내의 안내에는 단순히 술먹고 놀았던 장소로 희화화 하고 있다. 천년의 신라에서 경주남산이 가진 신성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이곳에서 술 먹고 놀고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성한 부처님의 땅으로 여기며, 오악 중 남악으로 남악신에게 제를 올리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뒷편 개울에는 1명이 들어갈 정도의 홈이 있는데, 이곳은 아마도 제사장이 제를 올리기 전에 목욕제계를 한 공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창림사지삼층석탑 창림사지는 신라 초기 왕궁터로도 알려져 있다. 왕궁터 이후 창림사지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는데, 발견된 문화유산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이다. 삼층석탑의 아수라가 언제나 눈에 먼저 들어온다. #창림사지쌍귀부 탑 주변으로 일부 석재들은 위치 그대로 볼 수 있는데, 발굴 후 주변을 탐방하기 어렵지 않았는데, 지금은 풀숲에 갇혀있어 쌍귀부로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파손이 심한 쌍귀부이지만 마주보는 도톰한 앞발 두개가 귀여워 보인다. #남간사지당간지주 당간지주 상부에 십자모양이 눈에 간다. 어떤 분의 블로그 글을 읽다가 이 모양이 통일신라 때의 기독교 전파된 흔적이 아닐가 추정하는 글을 보았다. 아마도 이건 그냥 모양을 만들면서 생긴 우연이 아날가 싶은데 과거의 유물을 보면서 이러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재미이기도 한 듯하다. #일성왕릉 (7대 일성왕) 제3대 유리왕의 적장자로 알려져 있는데, 유리왕의 사후 77년이나 지난 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이라, 일성의 자손이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3대 유리왕 사후 너무 어린 나이로 당시 세력을 장악한 4대 탈해가 왕이 되었다. 그 이후 4대 탈해왕도 후사가 없었고, 태자였던 김알지가 왕위를 양보하여, 3대 유리왕의 둘째 아들인 5대 파사(일성왕의 동생)가 먼저 왕위에 오르고, 파사의 장자인 6대 지마왕 이후에 왕위에 오르게 된 경우이다. ​ 일성왕은 장지 기록이 없으나, 조선 영조 6년에 박씨 문중에 의해 서남산 지역의 왕릉이 일괄적으로 비정했는데, 아마도 조선 양반의 유교적 사고로 3대 유리왕의 장자라는 측면에서 오릉에서 가까운 순으로 6대 지마왕보다 7대 일성왕릉으로 비정된 듯 하다는 의견이 있다. 이곳은 장지 기록이 해목령 아래라고 하는 55대 경애왕릉이란 주장이 더 합리적이다. 왕릉으로 들어가는 길목 좌측에 소나무 숲속에는 신라왕릉 연구에 큰 성과를 냈지만,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故 이근직 교수 수목장과 추모석이 있다. 돌에는 ‘新羅王陵을 연구하던 神遊林을 기리미’라고 조각되어 있다. #육부전 매번 문이 잠겨 담너머로만 내부를 잠시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잠시 문으로 출입하는 분이 있어 양해를 구하고 육부촌 촌장님께 인사드릴 수 있었다. 육부전의 문이 6개 일 듯한데, 왜 5개 일까? #나정 경주나정 발굴을 통해서 팔각형의 건물터와 타원형 우물터가 확인되었다. 팔각형의 건물은 시조가 태어난 곳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제사 시설인 ‘신궁’의 터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최근 팔각건물지 기단을 복원하였다. 구재로 보이는 모서리 석재 2개와 기단석 1개 이외에는 모두 신재로 되어 있다. 최근 기단 복원이 된 곳에는 사천왕사지 서목탑지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제21대 소지 마립간이 시조가 태어난 곳인 나을(羅乙)에 신궁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시조는 박혁거세 이므로, 나을은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나정(羅井)이라고 볼 수 있고, 2대 왕인 남해 차차웅은 이곳에 시조묘를 세웠었다고 한다. ​ 나정은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강지로 전해오는 곳이며 1803년 순조 3년에 시조왕의 내력을 기록한 유허비와 비각이 있다. #식혜곡석조유구 (구)오릉초등학교 내부에 식혜곡에서 발견된 석조유구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오릉 오릉은 1970년도 경주유적지 정비사업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관삼 사항이기도 했으며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오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경주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역으로 생각하면 경주 톨게이트 위치 선정에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까 싶기도. ? ​ 오릉의 피장자는 1세기와 2세기초에 재위했던 ①신라 시조 1대 혁거세왕, ②알영부인, ③2대 남해왕, ④3대 유리왕, ⑤5대 파사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특정 고분을 누구의 능인 지는 지정하지 않았다. 서쪽의 제1호분이라 불리우는 능의 규모가 가장 큰데 나머지 능은 그 규모가 적어서 왕능인지 의심이 들기에 충분하다. ​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기이편에 의거하여 통일신라 중대 이후부터 사릉이라는 능호와 함께 5명의 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릉 안에는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인 알영정과 조선 세종 11년에 세어진 박씨 재실인 숭덕전이 있다. 대릉원도 무료입장인데, 오릉은 아직 유료입장이다. 신라왕릉 중에 유료로 입장해야 하는 두곳(천마총, 오릉) 중 하나 이유가 뭘까..? #혁거세왕릉 (1대 혁거세왕) '삼국사기'에는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뤘는데, 이것이 진한의 6부라고 하면서, 이 진한의 6부가 곧 신라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조선은 고조선을 이야기한다. 혁거세의 등장은 신화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와 유사의 기록에 차이가 있다. ​ '삼국사기'에는 6부촌 중에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에서 알을 발견하여 그 속에서 나온 혁거세를 키웠다고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마을 촌장들이 함께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분명한 것은 혁거세가 양산촌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영부인은 고허촌 출신이다. 양산촌 출신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는 과정에 고허촌이 적극 지지하므로써 그 공로로 알영이 왕비가 된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전한다. 나라를 다스린 61년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고,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큰 뱀이 나와서 못 하도록 방해를 하므로 다섯 동강 난 몽뚱이를 다섯 능에 각각 장사하고 이릉을 '사릉'이라 하니,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혁거세의 죽음이 평범하지만은 않았다는 추측 정도는 가능해 보인다. #남해왕릉 (2대 남해왕) 남해왕은 혁거세의 둘째아들로 '삼국사기'에 남해왕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두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 혁거세의 죽음이 반란에 의한 죽음이었고, 남해왕이 그 반란을 수습하는데 공이 많아 백성들에 의해 왕에 추대된 것이라 추측 할 수 있다. 남해왕 대에 이러한 혼란 속에 왕은 현명하고 용맹하다는 소문이 돌았던 석탈해(4대 탈해왕)를 불러 딸과 혼인시키고 대보에 임명했다. 남해왕은 차차웅이라 불리었는데, '화랑세기'에는 이는 무당이란 뜻으로, 제사장을 겸한 왕이라고 전하고 있다. #유리왕릉 (3대 유리왕) 유리왕은 남해왕의 태자인데, '삼국유사'에는 그를 '노례왕' 또는 '유례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14대 유례왕이 있어서 아마도 이름이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정리가 된 듯. 남해왕이 태자인 유리와 사위인 탈해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탈해는 왕위를 양보하였다, 탈해는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면서 떡을 깨물어 이의 수를 세어 보았고, 유리가 이 수가 더 많자 유리를 받들었다. 그 후로 '잇자국' 이라는 뜻의 '이사금'을 왕호로 하였다고 전한다. 이사금이 차츰 변하여 임금으로 불리게 되었다. #파사왕릉 (5대 파사왕) '삼국사기'에는 4대 탈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신하들이 3대 유리왕의 태자 일성(7대 일성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으나, 누군가 일성이 적자이긴 하나 파사(유리왕의 차남) 만큼 총명하지 못하다 하여 신하들이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당시의 세력을 쥐고 있었던 탈해 세력의 지지와 김알지의 손녀와 결혼하여 김알지계 세력의 지지를 한꺼번에 받았지 않았나 본다. #알영왕비릉 '삼국사기'에는 알영정(閼英井)가에 용(또는 鷄龍)이 나타나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고 갔다. 여자아이는 입술이 닭부리와 닮아 월성 북쪽 천(北川)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니 부리가 퉁겨져 떨어져서 발천이라고도 하였다고 전한다.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하였고, 용모와 인품이 뛰어나 박혁거세의 비가 되어 백성들에게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렸다. 라고 전한다. 최근 월성 북쪽 천이라고 알려진 알영왕비와 관련된 발천에 대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차량으로 내남면 부지리 경덕왕릉으로 이동한다. #경덕왕릉 (35대 경덕왕) 35대 경덕왕은 34대 성덕왕의 아들로 유학 사상에 입각한 전제왕권 정치를 꿈꾸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화 시킨 왕으로 전해진다. 월정교와 춘양교를 세웠고, 불국사, 석굴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 경덕왕의 생식기 길이가 8치(24센티미터)나 될 정도로 정력이 왕성해 보이는 왕이였지만 자식 복은 없었나 보다.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들어가는 길의 소나무숲 길이 정감있는 길이기도하며, 봄에 진달래꽃이 필 때 쯤 오면 더욱 좋기도 하다. 신라 왕릉 중에서 십이지신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34대 성덕왕릉인데, 그곳은 환조의 형태로 나타내었고, 호석에 부조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십이지상이 시원은 중국 당대로 알려져 있으나, 동아시아에 무덤의 호석에 십이지상을 표현한 경우는 통일신라뿐이라고 하니 독창적인 무덤 형태이다. 십이지는 방위의 개념도 있지만, 무복을 입은 형태의 십이지는 무덤을 호위하는 신장상의 의미가 있는 듯 하다. ​ 다시 차량을 이용하여 내남면 망성리로 이동(10분)하여 통일신라 후기 비운이 왕 2분을 만난다. 명색이 왕릉인데 주변에 주차할 공간조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고, 왕릉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는 개인집 담벼락에 붙어있다. 비운의 왕을 만나는 왕릉 탐방길이 실감 난다. #희강왕릉 (43대 희강왕) 42대 흥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신라 왕족들 간의 처절한 권력 암투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44대 김명(민애왕)과 함께 왕권을 잡았지만, 정치적 동지였던 민애왕의 반란으로 자진한 불운의 임금이었다. ​ 왕릉이라 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고, 민묘처럼 보여, 왕릉이 아닌 묘로 추정하기도 한다. 반란으로 자진한 왕이긴 하지만, 전대 왕인 흥덕왕릉에 비히면 너무나 초라하고 규모 면에서도 왕릉이라 하기에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는 곳이다. 왕릉의 위치라 하기에 부족함이 넘치는 비탈지고 경사진 곳에 평탄작업 없이 그대로 왕릉을 조성하였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곳의 왕릉 비정이 무리가 있는 것 아닌가 한다. 서악권역의 진흥왕릉이나 진지왕릉도 마찬가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 소산에 장사지냈다는기록이 있고,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서 비정되었다. #민애왕릉 (44대 민애왕) 43대 희강왕을 옹립했던 김명이 다시 왕을 시해(자진)하고 본인이 왕이 되었는데 44대 민애왕이다. 하지만 그도 얼마 있지 않아 해상왕 장보고 등의 세력의 힘을 빌린 45대 신무왕 의해 시해 되었다. 이러한 이어지는 왕권 다툼은 신라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역사이기도 하다. 신라사회는 35대 경덕왕까지 약간의 권력다툼이 있었지만, 화백제도의 민주적 절차에 따라 순리에 의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36대 혜공왕부터 마지막 1백70년 동안 21명의 왕들은 힘센 놈이 죽이고 죽이는 쿠테타 왕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능의 받침돌이 신문왕릉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 1984년 발굴을 진행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최근 다시 발굴을 진행하였다. 장보고에 패한 후 왕의 예로 장례 지냈다는 기록만 있고, 위치가 없는데,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현재 구정동 방형분을 민애왕릉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 ■ 탐방 참고사항 ▶ 주차 : 왕릉탐방은 걷기로만 이루어지지 않아 차량이동도 포함됩니다. 1코스는 오릉주차장(1천원), 서남산주차장(2천원) 유로주차장을 이용합니다. 2코스는 경덕왕릉주차장 이용 가능하지만, 민애,희강왕릉은 주차장이 따로 없으므로 주변 저수지 갓길을 이용 ▶ 식수 : 식수는 중간 보충 가능 ▶ 화장실 : 화장실은 탐방로에 여러 곳(서남산주차장,삼불사,포석정,오릉 등) 이용 가능 ▶ 기타 : 민애.희강왕릉 탐방시 주차에 유의 필요, 마을 안에는 주차공간이 없으므로 입구 저수지 주변 주차후 이동 ▣ 청월의 산행일기 & 문화유산 탐방기(블로그) : https://blog.naver.com/kimbak65 #ramblr #램블러 #산은주인이고우리는손님이다 #경주남산한걸음더들어가기

Hiking/Backpacking

Gyeongju-si, Gyeongsangbuk-do, South Korea
dwkim65 photo
time : Nov 26, 2023 8:10 AM
duration : 6h 12m 34s
distance : 18.7 km
total_ascent : 271 m
highest_point : 129 m
avg_speed : 3.7 km/h
user_id : dwkim65
user_firstname : 대웅
user_lastname : 김
[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2/5 #1 경애왕릉,삼릉,지마왕릉,일성왕릉,오릉(혁거세,남해,유리,파사) ] ■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왕릉탐방 2/5 경애왕릉, 삼릉(아달라왕릉,신덕왕릉,경명왕릉), 지마왕릉, 일성왕릉, 오릉(혁거세왕릉,알영왕비릉,남해왕릉,유리왕릉,파사왕릉), 경덕왕릉, 희강왕릉, 민애왕릉 ▶ 탐방일자 : 2023.11.26(일) ▶ 날씨 : 맑음, 미세먼지 : 보통 ​ +----------☆----------○-----------◎----------◇----------□----------+ ▶ 코스1 : 삼릉숲 입구 -> 55대 경애왕릉 -> 삼릉(8대 아달라왕릉,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 -> 망월사 연화탑 ->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 삼불사 -> 태진지 -> 6대 지마왕릉 -> 포석정 -> 창림사지 -> 남간사지 당간지주 -> 7대 일성왕릉 -> 육부전 -> 나정 -> 식혜곡 석조유구 -> 오릉(1대 혁거세왕릉, 2대 남해왕릉, 3대 유리왕릉, 5대 파사왕릉, 알영왕비릉) -> 오릉 주차장 ▶ 거리 및 시간 : 11.3km, 4시간 ▶ GPS Log - Ramblr(램블러) Trip : http://rblr.co/onA3q +----------☆----------○-----------◎----------◇----------□----------+ ▶ 코스2 : 오릉 주차장 -> 차량이동(내남면 부지리) -> 35대 경덕왕릉 -> 차량이동(내남면 망성리) -> 43대 희강왕릉 -> 44대 민애왕릉 ▶ 거리 및 시간 : 2km, 1시간 ▶ GPS Log - Ramblr(램블러) Trip : http://rblr.co/onA3z +----------☆----------○-----------◎----------◇----------□----------+ ※ '신라왕릉' 네이버 지도 저장(즐겨찾기) 기능 이용하기 https://naver.me/xecn79Pc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탐방에 대한 생각은 다른 글에 남긴다. #경주남산왕릉탐방 #신라왕릉가는길 #신라왕릉길을걷다 #경주왕릉 #신라왕릉 #왕릉탐방 https://blog.naver.com/kimbak65/223266819863 +----------☆----------○-----------◎----------◇----------□----------+ ■ 탐방 후기 #경주 #경주남산 #세계문화유산 #경주남산문화유산탐방 #경주문화유산탐방 #문화유산탐방 #문화유산탐방산행 서남산 삼릉가는길을 걷고, 내남권역의 왕릉 3곳은 차량으로 이동하는 탐방길이다. 이 길은 신라 박씨 왕 10명의 모두를 만날 수 있다. 문헌 상의 기록은 개무시하고 조선 영조 6년에 김씨와 왕릉 농갈라 먹기를 통해 서남산을 할애받아 무작위로 박씨 10명 모두 왕릉을 비정했다. 서남산에 박씨 릉이 박씨 조상이 아님이 분명한데 재를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애왕릉 (55대 경애왕) 삼릉에 있는 53대 신덕왕의 아들로 박씨의 마지막 왕이며 견훤에게 죽임(자결)을 당한 비운의 왕이다. 효공왕 이후 새로 시작된 3명의 박씨 왕조를 끝나고, 견훤에 의해 다음 왕으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씨 56대 경순왕이 시작되었다. 고려의 왕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견훤의 공격에 대비하여 포석정에서 제를 올리다가 최후를 맞이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배풀었다고 되어 있으나, 음력 11월 추운 겨울 날에 적군이 처들어오는 와중에 연회를 배풀었다는 것은 신라 패망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한 김부식의 조작과 친일사학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포석정 방문자센터 내부 안내판에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 먹고 놀다 신라를 망쳤다' 라는 일제의 신민사관에 의한 왜곡을 한심하게도 그대로 받아 적고 있다. 견훤이 영천까지 와서 위협하는 시기에 경애왕이 음력 11월에 추운 겨울날에 야외에서 술 먹고 놀았다는 이야기도 현실성이 없다. 왕이 백성을 외면하고 술 먹고 놀다가 나라 망한 민족이니,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대일항쟁기(일제감점기) 일제 사학자들의 왜곡된 주장 일 뿐이다. ​ 왕릉은 해목령에 모셨다고 되어 있으나, 해목령 주변에 발견된 릉은 없고, 아래에 일성왕릉이 경애왕릉이라는 주장이 있다.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삼릉 3기의 왕릉이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동쪽에서부터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릉, 그리고 54대 경명왕릉이 있다. 아달라왕과 신덕왕과 720여년이 차이가 나는데도 당시 박씨 일족에 의해 비정되었다. 우후죽순처럼 하늘로 자유자재로 자란 소나무숲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왕릉 비정의 스토리는 아름답지 못한 곳이다. 입구 삼릉 안내석에는 서쪽에 아달라왕릉이 안내하고, 삼릉 안내판에는 서쪽에 경덕왕릉이라 안내한다. 입구 안내석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아달라왕릉 (8대 아달라왕) 잠시 후에 만날 6대 지마왕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도 아달라왕 13년에 정월 초하루 날에 개기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 연오랑 세오녀의 설화와도 관련이 있다. 당시의 이러한 일식 자연현상은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8대까지 대부분 박씨로 이어지던 신라왕조는 석씨에 의해서 아달라왕은 제거되고, 석씨 9대 벌휴왕의 시대로 이어진다. 조선 영조 6년에 장지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지만 박씨 문중에 의해 임의로 비정되었다. #신덕왕릉 (53대 신덕왕) 지난주 탐방한 김씨 52대 효공왕을 제거하고, 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으로 박씨 왕조의 부활을 시작한 왕이다. 17대 내물왕으로 시작된 김씨 왕조는 박씨들에 의해 52대 효공왕을 몰아내고 560년간의 김씨왕조를 끝내버렸다. 박씨 왕조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신덩왕은 화장하였고 능은 죽성에 마련하였다고 기록이 있으나, 이렇게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죽성이 남산인건가? #경명왕릉 (54대 경명왕) 후삼국시대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왕건이 태봉의 궁예를 물러내고 고려를 창업한 시기이기도 하다. 후백제의 견훤의 공격에 대비해 왕건에게 군사 요청을 하면서 신라의 호족들은 왕건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시기, 혼란의 정국 말기에 쇠락한 신라를 유지하기 위해 고려에 위탁했던 시기인데 그도 오래 살지 못했다.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 후 뼈는 성등 야산 서쪽에 뿌렸다 전해지지만 위치와 상관없이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흔히 배리삼존불로 불리는 곳이다. 불상을 보호한다고 세운 보호각으로 인해, 햇빛을 받지 못한 불상의 자연미는 사라져 아름다운 미소는 사라지고, 석재에 이끼만 가득하고, 표면은 아파하고 있다. 보호각을 철거하던지, 비취 된 엽서의 미소를 찾을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길 바래본다. 동지가 다가와서 부처님 전에 쌀과 팥을 올렸다. #지마왕릉 (6대 지마왕) 5대 파사왕의 아들로 국내 정세는 안정되었지만 왜와 가야, 말갈 등의 침공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외교 능력을 시험 받았던 시기이다. 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성왕릉과 같이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임의로 비정되었다. #포석정 신라의 패망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포석사라는 기와편이 발견되었는데, 사찰이 아니라 제당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포석정지 방문자센터 내의 안내에는 단순히 술먹고 놀았던 장소로 희화화 하고 있다. 천년의 신라에서 경주남산이 가진 신성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이곳에서 술 먹고 놀고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성한 부처님의 땅으로 여기며, 오악 중 남악으로 남악신에게 제를 올리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뒷편 개울에는 1명이 들어갈 정도의 홈이 있는데, 이곳은 아마도 제사장이 제를 올리기 전에 목욕제계를 한 공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창림사지삼층석탑 창림사지는 신라 초기 왕궁터로도 알려져 있다. 왕궁터 이후 창림사지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는데, 발견된 문화유산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이다. 삼층석탑의 아수라가 언제나 눈에 먼저 들어온다. #창림사지쌍귀부 탑 주변으로 일부 석재들은 위치 그대로 볼 수 있는데, 발굴 후 주변을 탐방하기 어렵지 않았는데, 지금은 풀숲에 갇혀있어 쌍귀부로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파손이 심한 쌍귀부이지만 마주보는 도톰한 앞발 두개가 귀여워 보인다. #남간사지당간지주 당간지주 상부에 십자모양이 눈에 간다. 어떤 분의 블로그 글을 읽다가 이 모양이 통일신라 때의 기독교 전파된 흔적이 아닐가 추정하는 글을 보았다. 아마도 이건 그냥 모양을 만들면서 생긴 우연이 아날가 싶은데 과거의 유물을 보면서 이러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재미이기도 한 듯하다. #일성왕릉 (7대 일성왕) 제3대 유리왕의 적장자로 알려져 있는데, 유리왕의 사후 77년이나 지난 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이라, 일성의 자손이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3대 유리왕 사후 너무 어린 나이로 당시 세력을 장악한 4대 탈해가 왕이 되었다. 그 이후 4대 탈해왕도 후사가 없었고, 태자였던 김알지가 왕위를 양보하여, 3대 유리왕의 둘째 아들인 5대 파사(일성왕의 동생)가 먼저 왕위에 오르고, 파사의 장자인 6대 지마왕 이후에 왕위에 오르게 된 경우이다. ​ 일성왕은 장지 기록이 없으나, 조선 영조 6년에 박씨 문중에 의해 서남산 지역의 왕릉이 일괄적으로 비정했는데, 아마도 조선 양반의 유교적 사고로 3대 유리왕의 장자라는 측면에서 오릉에서 가까운 순으로 6대 지마왕보다 7대 일성왕릉으로 비정된 듯 하다는 의견이 있다. 이곳은 장지 기록이 해목령 아래라고 하는 55대 경애왕릉이란 주장이 더 합리적이다. 왕릉으로 들어가는 길목 좌측에 소나무 숲속에는 신라왕릉 연구에 큰 성과를 냈지만,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故 이근직 교수 수목장과 추모석이 있다. 돌에는 ‘新羅王陵을 연구하던 神遊林을 기리미’라고 조각되어 있다. #육부전 매번 문이 잠겨 담너머로만 내부를 잠시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잠시 문으로 출입하는 분이 있어 양해를 구하고 육부촌 촌장님께 인사드릴 수 있었다. 육부전의 문이 6개 일 듯한데, 왜 5개 일까? #나정 경주나정 발굴을 통해서 팔각형의 건물터와 타원형 우물터가 확인되었다. 팔각형의 건물은 시조가 태어난 곳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제사 시설인 ‘신궁’의 터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최근 팔각건물지 기단을 복원하였다. 구재로 보이는 모서리 석재 2개와 기단석 1개 이외에는 모두 신재로 되어 있다. 최근 기단 복원이 된 곳에는 사천왕사지 서목탑지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제21대 소지 마립간이 시조가 태어난 곳인 나을(羅乙)에 신궁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시조는 박혁거세 이므로, 나을은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나정(羅井)이라고 볼 수 있고, 2대 왕인 남해 차차웅은 이곳에 시조묘를 세웠었다고 한다. ​ 나정은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강지로 전해오는 곳이며 1803년 순조 3년에 시조왕의 내력을 기록한 유허비와 비각이 있다. #식혜곡석조유구 (구)오릉초등학교 내부에 식혜곡에서 발견된 석조유구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오릉 오릉은 1970년도 경주유적지 정비사업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관삼 사항이기도 했으며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오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경주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역으로 생각하면 경주 톨게이트 위치 선정에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까 싶기도. ? ​ 오릉의 피장자는 1세기와 2세기초에 재위했던 ①신라 시조 1대 혁거세왕, ②알영부인, ③2대 남해왕, ④3대 유리왕, ⑤5대 파사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특정 고분을 누구의 능인 지는 지정하지 않았다. 서쪽의 제1호분이라 불리우는 능의 규모가 가장 큰데 나머지 능은 그 규모가 적어서 왕능인지 의심이 들기에 충분하다. ​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기이편에 의거하여 통일신라 중대 이후부터 사릉이라는 능호와 함께 5명의 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릉 안에는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인 알영정과 조선 세종 11년에 세어진 박씨 재실인 숭덕전이 있다. 대릉원도 무료입장인데, 오릉은 아직 유료입장이다. 신라왕릉 중에 유료로 입장해야 하는 두곳(천마총, 오릉) 중 하나 이유가 뭘까..? #혁거세왕릉 (1대 혁거세왕) '삼국사기'에는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뤘는데, 이것이 진한의 6부라고 하면서, 이 진한의 6부가 곧 신라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조선은 고조선을 이야기한다. 혁거세의 등장은 신화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와 유사의 기록에 차이가 있다. ​ '삼국사기'에는 6부촌 중에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에서 알을 발견하여 그 속에서 나온 혁거세를 키웠다고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마을 촌장들이 함께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분명한 것은 혁거세가 양산촌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영부인은 고허촌 출신이다. 양산촌 출신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는 과정에 고허촌이 적극 지지하므로써 그 공로로 알영이 왕비가 된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전한다. 나라를 다스린 61년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고,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큰 뱀이 나와서 못 하도록 방해를 하므로 다섯 동강 난 몽뚱이를 다섯 능에 각각 장사하고 이릉을 '사릉'이라 하니,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혁거세의 죽음이 평범하지만은 않았다는 추측 정도는 가능해 보인다. #남해왕릉 (2대 남해왕) 남해왕은 혁거세의 둘째아들로 '삼국사기'에 남해왕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두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 혁거세의 죽음이 반란에 의한 죽음이었고, 남해왕이 그 반란을 수습하는데 공이 많아 백성들에 의해 왕에 추대된 것이라 추측 할 수 있다. 남해왕 대에 이러한 혼란 속에 왕은 현명하고 용맹하다는 소문이 돌았던 석탈해(4대 탈해왕)를 불러 딸과 혼인시키고 대보에 임명했다. 남해왕은 차차웅이라 불리었는데, '화랑세기'에는 이는 무당이란 뜻으로, 제사장을 겸한 왕이라고 전하고 있다. #유리왕릉 (3대 유리왕) 유리왕은 남해왕의 태자인데, '삼국유사'에는 그를 '노례왕' 또는 '유례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14대 유례왕이 있어서 아마도 이름이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정리가 된 듯. 남해왕이 태자인 유리와 사위인 탈해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탈해는 왕위를 양보하였다, 탈해는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면서 떡을 깨물어 이의 수를 세어 보았고, 유리가 이 수가 더 많자 유리를 받들었다. 그 후로 '잇자국' 이라는 뜻의 '이사금'을 왕호로 하였다고 전한다. 이사금이 차츰 변하여 임금으로 불리게 되었다. #파사왕릉 (5대 파사왕) '삼국사기'에는 4대 탈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신하들이 3대 유리왕의 태자 일성(7대 일성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으나, 누군가 일성이 적자이긴 하나 파사(유리왕의 차남) 만큼 총명하지 못하다 하여 신하들이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당시의 세력을 쥐고 있었던 탈해 세력의 지지와 김알지의 손녀와 결혼하여 김알지계 세력의 지지를 한꺼번에 받았지 않았나 본다. #알영왕비릉 '삼국사기'에는 알영정(閼英井)가에 용(또는 鷄龍)이 나타나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고 갔다. 여자아이는 입술이 닭부리와 닮아 월성 북쪽 천(北川)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니 부리가 퉁겨져 떨어져서 발천이라고도 하였다고 전한다.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하였고, 용모와 인품이 뛰어나 박혁거세의 비가 되어 백성들에게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렸다. 라고 전한다. 최근 월성 북쪽 천이라고 알려진 알영왕비와 관련된 발천에 대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차량으로 내남면 부지리 경덕왕릉으로 이동한다. #경덕왕릉 (35대 경덕왕) 35대 경덕왕은 34대 성덕왕의 아들로 유학 사상에 입각한 전제왕권 정치를 꿈꾸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화 시킨 왕으로 전해진다. 월정교와 춘양교를 세웠고, 불국사, 석굴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 경덕왕의 생식기 길이가 8치(24센티미터)나 될 정도로 정력이 왕성해 보이는 왕이였지만 자식 복은 없었나 보다.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들어가는 길의 소나무숲 길이 정감있는 길이기도하며, 봄에 진달래꽃이 필 때 쯤 오면 더욱 좋기도 하다. 신라 왕릉 중에서 십이지신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34대 성덕왕릉인데, 그곳은 환조의 형태로 나타내었고, 호석에 부조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십이지상이 시원은 중국 당대로 알려져 있으나, 동아시아에 무덤의 호석에 십이지상을 표현한 경우는 통일신라뿐이라고 하니 독창적인 무덤 형태이다. 십이지는 방위의 개념도 있지만, 무복을 입은 형태의 십이지는 무덤을 호위하는 신장상의 의미가 있는 듯 하다. ​ 다시 차량을 이용하여 내남면 망성리로 이동(10분)하여 통일신라 후기 비운이 왕 2분을 만난다. 명색이 왕릉인데 주변에 주차할 공간조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고, 왕릉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는 개인집 담벼락에 붙어있다. 비운의 왕을 만나는 왕릉 탐방길이 실감 난다. #희강왕릉 (43대 희강왕) 42대 흥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신라 왕족들 간의 처절한 권력 암투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44대 김명(민애왕)과 함께 왕권을 잡았지만, 정치적 동지였던 민애왕의 반란으로 자진한 불운의 임금이었다. ​ 왕릉이라 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고, 민묘처럼 보여, 왕릉이 아닌 묘로 추정하기도 한다. 반란으로 자진한 왕이긴 하지만, 전대 왕인 흥덕왕릉에 비히면 너무나 초라하고 규모 면에서도 왕릉이라 하기에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는 곳이다. 왕릉의 위치라 하기에 부족함이 넘치는 비탈지고 경사진 곳에 평탄작업 없이 그대로 왕릉을 조성하였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곳의 왕릉 비정이 무리가 있는 것 아닌가 한다. 서악권역의 진흥왕릉이나 진지왕릉도 마찬가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 소산에 장사지냈다는기록이 있고,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서 비정되었다. #민애왕릉 (44대 민애왕) 43대 희강왕을 옹립했던 김명이 다시 왕을 시해(자진)하고 본인이 왕이 되었는데 44대 민애왕이다. 하지만 그도 얼마 있지 않아 해상왕 장보고 등의 세력의 힘을 빌린 45대 신무왕 의해 시해 되었다. 이러한 이어지는 왕권 다툼은 신라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역사이기도 하다. 신라사회는 35대 경덕왕까지 약간의 권력다툼이 있었지만, 화백제도의 민주적 절차에 따라 순리에 의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36대 혜공왕부터 마지막 1백70년 동안 21명의 왕들은 힘센 놈이 죽이고 죽이는 쿠테타 왕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능의 받침돌이 신문왕릉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 1984년 발굴을 진행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최근 다시 발굴을 진행하였다. 장보고에 패한 후 왕의 예로 장례 지냈다는 기록만 있고, 위치가 없는데,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현재 구정동 방형분을 민애왕릉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 ■ 탐방 참고사항 ▶ 주차 : 왕릉탐방은 걷기로만 이루어지지 않아 차량이동도 포함됩니다. 1코스는 오릉주차장(1천원), 서남산주차장(2천원) 유로주차장을 이용합니다. 2코스는 경덕왕릉주차장 이용 가능하지만, 민애,희강왕릉은 주차장이 따로 없으므로 주변 저수지 갓길을 이용 ▶ 식수 : 식수는 중간 보충 가능 ▶ 화장실 : 화장실은 탐방로에 여러 곳(서남산주차장,삼불사,포석정,오릉 등) 이용 가능 ▶ 기타 : 민애.희강왕릉 탐방시 주차에 유의 필요, 마을 안에는 주차공간이 없으므로 입구 저수지 주변 주차후 이동 ▣ 청월의 산행일기 & 문화유산 탐방기(블로그) : https://blog.naver.com/kimbak65 #ramblr #램블러 #산은주인이고우리는손님이다 #경주남산한걸음더들어가기 [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2/5 #2 (내남권역-경덕왕릉, 희강왕릉, 민애왕릉) ] ■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왕릉탐방 2/5 경애왕릉, 삼릉(아달라왕릉,신덕왕릉,경명왕릉), 지마왕릉, 일성왕릉, 오릉(혁거세왕릉,알영왕비릉,남해왕릉,유리왕릉,파사왕릉), 경덕왕릉, 희강왕릉, 민애왕릉 ▶ 탐방일자 : 2023.11.26(일) ▶ 날씨 : 맑음, 미세먼지 : 보통 ​ +----------☆----------○-----------◎----------◇----------□----------+ ▶ 코스1 : 삼릉숲 입구 -> 55대 경애왕릉 -> 삼릉(8대 아달라왕릉,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 -> 망월사 연화탑 ->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 삼불사 -> 태진지 -> 6대 지마왕릉 -> 포석정 -> 창림사지 -> 남간사지 당간지주 -> 7대 일성왕릉 -> 육부전 -> 나정 -> 식혜곡 석조유구 -> 오릉(1대 혁거세왕릉, 2대 남해왕릉, 3대 유리왕릉, 5대 파사왕릉, 알영왕비릉) -> 오릉 주차장 ▶ 거리 및 시간 : 11.3km, 4시간 ▶ GPS Log - Ramblr(램블러) Trip : http://rblr.co/onA3q +----------☆----------○-----------◎----------◇----------□----------+ ▶ 코스2 : 오릉 주차장 -> 차량이동(내남면 부지리) -> 35대 경덕왕릉 -> 차량이동(내남면 망성리) -> 43대 희강왕릉 -> 44대 민애왕릉 ▶ 거리 및 시간 : 2km, 1시간 ▶ GPS Log - Ramblr(램블러) Trip : http://rblr.co/onA3z +----------☆----------○-----------◎----------◇----------□----------+ ※ '신라왕릉' 네이버 지도 저장(즐겨찾기) 기능 이용하기 https://naver.me/xecn79Pc '2023 신라왕릉 길을 걷다' 탐방에 대한 생각은 다른 글에 남긴다. #경주남산왕릉탐방 #신라왕릉가는길 #신라왕릉길을걷다 #경주왕릉 #신라왕릉 #왕릉탐방 https://blog.naver.com/kimbak65/223266819863 +----------☆----------○-----------◎----------◇----------□----------+ ■ 탐방 후기 #경주 #경주남산 #세계문화유산 #경주남산문화유산탐방 #경주문화유산탐방 #문화유산탐방 #문화유산탐방산행 서남산 삼릉가는길을 걷고, 내남권역의 왕릉 3곳은 차량으로 이동하는 탐방길이다. 이 길은 신라 박씨 왕 10명의 모두를 만날 수 있다. 문헌 상의 기록은 개무시하고 조선 영조 6년에 김씨와 왕릉 농갈라 먹기를 통해 서남산을 할애받아 무작위로 박씨 10명 모두 왕릉을 비정했다. 서남산에 박씨 릉이 박씨 조상이 아님이 분명한데 재를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애왕릉 (55대 경애왕) 삼릉에 있는 53대 신덕왕의 아들로 박씨의 마지막 왕이며 견훤에게 죽임(자결)을 당한 비운의 왕이다. 효공왕 이후 새로 시작된 3명의 박씨 왕조를 끝나고, 견훤에 의해 다음 왕으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씨 56대 경순왕이 시작되었다. 고려의 왕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견훤의 공격에 대비하여 포석정에서 제를 올리다가 최후를 맞이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배풀었다고 되어 있으나, 음력 11월 추운 겨울 날에 적군이 처들어오는 와중에 연회를 배풀었다는 것은 신라 패망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한 김부식의 조작과 친일사학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포석정 방문자센터 내부 안내판에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 먹고 놀다 신라를 망쳤다' 라는 일제의 신민사관에 의한 왜곡을 한심하게도 그대로 받아 적고 있다. 견훤이 영천까지 와서 위협하는 시기에 경애왕이 음력 11월에 추운 겨울날에 야외에서 술 먹고 놀았다는 이야기도 현실성이 없다. 왕이 백성을 외면하고 술 먹고 놀다가 나라 망한 민족이니,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대일항쟁기(일제감점기) 일제 사학자들의 왜곡된 주장 일 뿐이다. ​ 왕릉은 해목령에 모셨다고 되어 있으나, 해목령 주변에 발견된 릉은 없고, 아래에 일성왕릉이 경애왕릉이라는 주장이 있다.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삼릉 3기의 왕릉이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동쪽에서부터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릉, 그리고 54대 경명왕릉이 있다. 아달라왕과 신덕왕과 720여년이 차이가 나는데도 당시 박씨 일족에 의해 비정되었다. 우후죽순처럼 하늘로 자유자재로 자란 소나무숲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왕릉 비정의 스토리는 아름답지 못한 곳이다. 입구 삼릉 안내석에는 서쪽에 아달라왕릉이 안내하고, 삼릉 안내판에는 서쪽에 경덕왕릉이라 안내한다. 입구 안내석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아달라왕릉 (8대 아달라왕) 잠시 후에 만날 6대 지마왕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도 아달라왕 13년에 정월 초하루 날에 개기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 연오랑 세오녀의 설화와도 관련이 있다. 당시의 이러한 일식 자연현상은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8대까지 대부분 박씨로 이어지던 신라왕조는 석씨에 의해서 아달라왕은 제거되고, 석씨 9대 벌휴왕의 시대로 이어진다. 조선 영조 6년에 장지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지만 박씨 문중에 의해 임의로 비정되었다. #신덕왕릉 (53대 신덕왕) 지난주 탐방한 김씨 52대 효공왕을 제거하고, 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으로 박씨 왕조의 부활을 시작한 왕이다. 17대 내물왕으로 시작된 김씨 왕조는 박씨들에 의해 52대 효공왕을 몰아내고 560년간의 김씨왕조를 끝내버렸다. 박씨 왕조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신덩왕은 화장하였고 능은 죽성에 마련하였다고 기록이 있으나, 이렇게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죽성이 남산인건가? #경명왕릉 (54대 경명왕) 후삼국시대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왕건이 태봉의 궁예를 물러내고 고려를 창업한 시기이기도 하다. 후백제의 견훤의 공격에 대비해 왕건에게 군사 요청을 하면서 신라의 호족들은 왕건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시기, 혼란의 정국 말기에 쇠락한 신라를 유지하기 위해 고려에 위탁했던 시기인데 그도 오래 살지 못했다.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 후 뼈는 성등 야산 서쪽에 뿌렸다 전해지지만 위치와 상관없이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흔히 배리삼존불로 불리는 곳이다. 불상을 보호한다고 세운 보호각으로 인해, 햇빛을 받지 못한 불상의 자연미는 사라져 아름다운 미소는 사라지고, 석재에 이끼만 가득하고, 표면은 아파하고 있다. 보호각을 철거하던지, 비취 된 엽서의 미소를 찾을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길 바래본다. 동지가 다가와서 부처님 전에 쌀과 팥을 올렸다. #지마왕릉 (6대 지마왕) 5대 파사왕의 아들로 국내 정세는 안정되었지만 왜와 가야, 말갈 등의 침공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외교 능력을 시험 받았던 시기이다. 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성왕릉과 같이 조선 영조 6년 박씨 문중에 의해 임의로 비정되었다. #포석정 신라의 패망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포석사라는 기와편이 발견되었는데, 사찰이 아니라 제당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포석정지 방문자센터 내의 안내에는 단순히 술먹고 놀았던 장소로 희화화 하고 있다. 천년의 신라에서 경주남산이 가진 신성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이곳에서 술 먹고 놀고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성한 부처님의 땅으로 여기며, 오악 중 남악으로 남악신에게 제를 올리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뒷편 개울에는 1명이 들어갈 정도의 홈이 있는데, 이곳은 아마도 제사장이 제를 올리기 전에 목욕제계를 한 공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창림사지삼층석탑 창림사지는 신라 초기 왕궁터로도 알려져 있다. 왕궁터 이후 창림사지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는데, 발견된 문화유산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이다. 삼층석탑의 아수라가 언제나 눈에 먼저 들어온다. #창림사지쌍귀부 탑 주변으로 일부 석재들은 위치 그대로 볼 수 있는데, 발굴 후 주변을 탐방하기 어렵지 않았는데, 지금은 풀숲에 갇혀있어 쌍귀부로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파손이 심한 쌍귀부이지만 마주보는 도톰한 앞발 두개가 귀여워 보인다. #남간사지당간지주 당간지주 상부에 십자모양이 눈에 간다. 어떤 분의 블로그 글을 읽다가 이 모양이 통일신라 때의 기독교 전파된 흔적이 아닐가 추정하는 글을 보았다. 아마도 이건 그냥 모양을 만들면서 생긴 우연이 아날가 싶은데 과거의 유물을 보면서 이러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재미이기도 한 듯하다. #일성왕릉 (7대 일성왕) 제3대 유리왕의 적장자로 알려져 있는데, 유리왕의 사후 77년이나 지난 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이라, 일성의 자손이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3대 유리왕 사후 너무 어린 나이로 당시 세력을 장악한 4대 탈해가 왕이 되었다. 그 이후 4대 탈해왕도 후사가 없었고, 태자였던 김알지가 왕위를 양보하여, 3대 유리왕의 둘째 아들인 5대 파사(일성왕의 동생)가 먼저 왕위에 오르고, 파사의 장자인 6대 지마왕 이후에 왕위에 오르게 된 경우이다. ​ 일성왕은 장지 기록이 없으나, 조선 영조 6년에 박씨 문중에 의해 서남산 지역의 왕릉이 일괄적으로 비정했는데, 아마도 조선 양반의 유교적 사고로 3대 유리왕의 장자라는 측면에서 오릉에서 가까운 순으로 6대 지마왕보다 7대 일성왕릉으로 비정된 듯 하다는 의견이 있다. 이곳은 장지 기록이 해목령 아래라고 하는 55대 경애왕릉이란 주장이 더 합리적이다. 왕릉으로 들어가는 길목 좌측에 소나무 숲속에는 신라왕릉 연구에 큰 성과를 냈지만,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故 이근직 교수 수목장과 추모석이 있다. 돌에는 ‘新羅王陵을 연구하던 神遊林을 기리미’라고 조각되어 있다. #육부전 매번 문이 잠겨 담너머로만 내부를 잠시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잠시 문으로 출입하는 분이 있어 양해를 구하고 육부촌 촌장님께 인사드릴 수 있었다. 육부전의 문이 6개 일 듯한데, 왜 5개 일까? #나정 경주나정 발굴을 통해서 팔각형의 건물터와 타원형 우물터가 확인되었다. 팔각형의 건물은 시조가 태어난 곳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제사 시설인 ‘신궁’의 터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최근 팔각건물지 기단을 복원하였다. 구재로 보이는 모서리 석재 2개와 기단석 1개 이외에는 모두 신재로 되어 있다. 최근 기단 복원이 된 곳에는 사천왕사지 서목탑지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제21대 소지 마립간이 시조가 태어난 곳인 나을(羅乙)에 신궁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시조는 박혁거세 이므로, 나을은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나정(羅井)이라고 볼 수 있고, 2대 왕인 남해 차차웅은 이곳에 시조묘를 세웠었다고 한다. ​ 나정은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강지로 전해오는 곳이며 1803년 순조 3년에 시조왕의 내력을 기록한 유허비와 비각이 있다. #식혜곡석조유구 (구)오릉초등학교 내부에 식혜곡에서 발견된 석조유구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오릉 오릉은 1970년도 경주유적지 정비사업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관삼 사항이기도 했으며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오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경주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역으로 생각하면 경주 톨게이트 위치 선정에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까 싶기도. ? ​ 오릉의 피장자는 1세기와 2세기초에 재위했던 ①신라 시조 1대 혁거세왕, ②알영부인, ③2대 남해왕, ④3대 유리왕, ⑤5대 파사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특정 고분을 누구의 능인 지는 지정하지 않았다. 서쪽의 제1호분이라 불리우는 능의 규모가 가장 큰데 나머지 능은 그 규모가 적어서 왕능인지 의심이 들기에 충분하다. ​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기이편에 의거하여 통일신라 중대 이후부터 사릉이라는 능호와 함께 5명의 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릉 안에는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인 알영정과 조선 세종 11년에 세어진 박씨 재실인 숭덕전이 있다. 대릉원도 무료입장인데, 오릉은 아직 유료입장이다. 신라왕릉 중에 유료로 입장해야 하는 두곳(천마총, 오릉) 중 하나 이유가 뭘까..? #혁거세왕릉 (1대 혁거세왕) '삼국사기'에는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뤘는데, 이것이 진한의 6부라고 하면서, 이 진한의 6부가 곧 신라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조선은 고조선을 이야기한다. 혁거세의 등장은 신화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와 유사의 기록에 차이가 있다. ​ '삼국사기'에는 6부촌 중에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에서 알을 발견하여 그 속에서 나온 혁거세를 키웠다고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마을 촌장들이 함께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분명한 것은 혁거세가 양산촌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영부인은 고허촌 출신이다. 양산촌 출신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는 과정에 고허촌이 적극 지지하므로써 그 공로로 알영이 왕비가 된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전한다. 나라를 다스린 61년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고,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큰 뱀이 나와서 못 하도록 방해를 하므로 다섯 동강 난 몽뚱이를 다섯 능에 각각 장사하고 이릉을 '사릉'이라 하니,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혁거세의 죽음이 평범하지만은 않았다는 추측 정도는 가능해 보인다. #남해왕릉 (2대 남해왕) 남해왕은 혁거세의 둘째아들로 '삼국사기'에 남해왕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두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 혁거세의 죽음이 반란에 의한 죽음이었고, 남해왕이 그 반란을 수습하는데 공이 많아 백성들에 의해 왕에 추대된 것이라 추측 할 수 있다. 남해왕 대에 이러한 혼란 속에 왕은 현명하고 용맹하다는 소문이 돌았던 석탈해(4대 탈해왕)를 불러 딸과 혼인시키고 대보에 임명했다. 남해왕은 차차웅이라 불리었는데, '화랑세기'에는 이는 무당이란 뜻으로, 제사장을 겸한 왕이라고 전하고 있다. #유리왕릉 (3대 유리왕) 유리왕은 남해왕의 태자인데, '삼국유사'에는 그를 '노례왕' 또는 '유례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14대 유례왕이 있어서 아마도 이름이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정리가 된 듯. 남해왕이 태자인 유리와 사위인 탈해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탈해는 왕위를 양보하였다, 탈해는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면서 떡을 깨물어 이의 수를 세어 보았고, 유리가 이 수가 더 많자 유리를 받들었다. 그 후로 '잇자국' 이라는 뜻의 '이사금'을 왕호로 하였다고 전한다. 이사금이 차츰 변하여 임금으로 불리게 되었다. #파사왕릉 (5대 파사왕) '삼국사기'에는 4대 탈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신하들이 3대 유리왕의 태자 일성(7대 일성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으나, 누군가 일성이 적자이긴 하나 파사(유리왕의 차남) 만큼 총명하지 못하다 하여 신하들이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당시의 세력을 쥐고 있었던 탈해 세력의 지지와 김알지의 손녀와 결혼하여 김알지계 세력의 지지를 한꺼번에 받았지 않았나 본다. #알영왕비릉 '삼국사기'에는 알영정(閼英井)가에 용(또는 鷄龍)이 나타나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고 갔다. 여자아이는 입술이 닭부리와 닮아 월성 북쪽 천(北川)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니 부리가 퉁겨져 떨어져서 발천이라고도 하였다고 전한다.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하였고, 용모와 인품이 뛰어나 박혁거세의 비가 되어 백성들에게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렸다. 라고 전한다. 최근 월성 북쪽 천이라고 알려진 알영왕비와 관련된 발천에 대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차량으로 내남면 부지리 경덕왕릉으로 이동한다. #경덕왕릉 (35대 경덕왕) 35대 경덕왕은 34대 성덕왕의 아들로 유학 사상에 입각한 전제왕권 정치를 꿈꾸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화 시킨 왕으로 전해진다. 월정교와 춘양교를 세웠고, 불국사, 석굴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 경덕왕의 생식기 길이가 8치(24센티미터)나 될 정도로 정력이 왕성해 보이는 왕이였지만 자식 복은 없었나 보다.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들어가는 길의 소나무숲 길이 정감있는 길이기도하며, 봄에 진달래꽃이 필 때 쯤 오면 더욱 좋기도 하다. 신라 왕릉 중에서 십이지신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34대 성덕왕릉인데, 그곳은 환조의 형태로 나타내었고, 호석에 부조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십이지상이 시원은 중국 당대로 알려져 있으나, 동아시아에 무덤의 호석에 십이지상을 표현한 경우는 통일신라뿐이라고 하니 독창적인 무덤 형태이다. 십이지는 방위의 개념도 있지만, 무복을 입은 형태의 십이지는 무덤을 호위하는 신장상의 의미가 있는 듯 하다. ​ 다시 차량을 이용하여 내남면 망성리로 이동(10분)하여 통일신라 후기 비운이 왕 2분을 만난다. 명색이 왕릉인데 주변에 주차할 공간조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고, 왕릉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는 개인집 담벼락에 붙어있다. 비운의 왕을 만나는 왕릉 탐방길이 실감 난다. #희강왕릉 (43대 희강왕) 42대 흥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신라 왕족들 간의 처절한 권력 암투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44대 김명(민애왕)과 함께 왕권을 잡았지만, 정치적 동지였던 민애왕의 반란으로 자진한 불운의 임금이었다. ​ 왕릉이라 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고, 민묘처럼 보여, 왕릉이 아닌 묘로 추정하기도 한다. 반란으로 자진한 왕이긴 하지만, 전대 왕인 흥덕왕릉에 비히면 너무나 초라하고 규모 면에서도 왕릉이라 하기에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는 곳이다. 왕릉의 위치라 하기에 부족함이 넘치는 비탈지고 경사진 곳에 평탄작업 없이 그대로 왕릉을 조성하였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곳의 왕릉 비정이 무리가 있는 것 아닌가 한다. 서악권역의 진흥왕릉이나 진지왕릉도 마찬가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 소산에 장사지냈다는기록이 있고,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서 비정되었다. #민애왕릉 (44대 민애왕) 43대 희강왕을 옹립했던 김명이 다시 왕을 시해(자진)하고 본인이 왕이 되었는데 44대 민애왕이다. 하지만 그도 얼마 있지 않아 해상왕 장보고 등의 세력의 힘을 빌린 45대 신무왕 의해 시해 되었다. 이러한 이어지는 왕권 다툼은 신라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역사이기도 하다. 신라사회는 35대 경덕왕까지 약간의 권력다툼이 있었지만, 화백제도의 민주적 절차에 따라 순리에 의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36대 혜공왕부터 마지막 1백70년 동안 21명의 왕들은 힘센 놈이 죽이고 죽이는 쿠테타 왕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능의 받침돌이 신문왕릉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 1984년 발굴을 진행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최근 다시 발굴을 진행하였다. 장보고에 패한 후 왕의 예로 장례 지냈다는 기록만 있고, 위치가 없는데, 조선 영조 6년 김씨 문중에 의해 비정되었다. 현재 구정동 방형분을 민애왕릉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 ■ 탐방 참고사항 ▶ 주차 : 왕릉탐방은 걷기로만 이루어지지 않아 차량이동도 포함됩니다. 1코스는 오릉주차장(1천원), 서남산주차장(2천원) 유로주차장을 이용합니다. 2코스는 경덕왕릉주차장 이용 가능하지만, 민애,희강왕릉은 주차장이 따로 없으므로 주변 저수지 갓길을 이용 ▶ 식수 : 식수는 중간 보충 가능 ▶ 화장실 : 화장실은 탐방로에 여러 곳(서남산주차장,삼불사,포석정,오릉 등) 이용 가능 ▶ 기타 : 민애.희강왕릉 탐방시 주차에 유의 필요, 마을 안에는 주차공간이 없으므로 입구 저수지 주변 주차후 이동 ▣ 청월의 산행일기 & 문화유산 탐방기(블로그) : https://blog.naver.com/kimbak65 #ramblr #램블러 #산은주인이고우리는손님이다 #경주남산한걸음더들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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