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 경주 평생학습가족관.................
해설; 金球錫/남산연구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및 두산백과 참조-
Gyeongju-si, Gyeongsangbuk-do, South Korea
time : Jun 4, 2025 9:57 AM
duration : 2h 20m 26s
distance : 3.7 km
total_ascent : 154 m
highest_point : 81 m
avg_speed : 1.6 km/h
user_id : Karuna
user_firstname : KH
user_lastname : Suk
양동마을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크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조선시대 양반 씨족마을로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재상이며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을 배출한 6대 국반(國班) 여주이씨(광산 김씨, 반남 박씨, 은진 송씨, 덕수 이씨, 진보 이씨와 여주이씨가 6대 국반)와,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 손중돈 선생을 배출한 명문 도반(道班) 경주손씨 양성이 서로 협동하고 경쟁하며 600여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영남 남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문과 31명 포함 과거 급제자가 총 116명에 달했으며, 이밖에도 수많은 학자와 충절대의 명장,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면서 그 명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기와집의 수는 전국 최다로 이를 포함하여 국보 1점, 보물 4점, 국가민속문화재 12점, 경상북도지정문화재 8점 등 도합 25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에는 7개소의 국가 지정 전통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역사와 규모 및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및 가치, 그리고 뛰어난 건축과 조경양식,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의 면에서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전기까지는 혼인 후 남자가 여자 집에서 사는 장가 간다가 일반적인 생활 형태였다.
양동은 남자가 장가들어 사는 처가입향'(妻家入鄕)의 대표적인 사례로, 풍덕 류씨 남자가 여주 이씨 처가에 장가 들고,
시간이 지나 경주 손씨 남자가 풍덕 류씨 처가에 장가 들고,
뒤이어 또 다른 여주 이씨 남자가 경주 손씨 처가에 장가들면서 정착해 간 사례다.
양동은 조선 전기 이후 처가입향으로 맨 마지막에 들어온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 양성이 유교적 종법질서를 신봉하고,
또한 국가적으로 명성을 얻은 인물들을 배출하기 시작하면서 장가 '가지 않고' 시집 '오게' 하면서 집단으로 세거해왔다.
이러한 역사를 약 600년째 이어오고 있는 양동마을은 조선 시대 남아 있는 씨족마을의 가장 오래된 사례이다.
또한 이러한 씨족마을 공간을 기능적, 경관적으로 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 유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양동마을은 씨족마을인 동시에 양반세거지로서,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 양반들을 보필할 노비들이 공존하는 형태였다.
즉 양반들의 기와집 아래 서너 호의 초가집 소위 가랍집이 딸린 형태,
혹은 기와집 안에 초가로 된 집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사회의 엄격한 신분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양반들도 초가에서 생활했다.
따라서 양동을 '민속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