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퇴근. 왕십리까지.

오후 4시에 사무실에서 나왔다. 전에 다니던 논현동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라도 찍어볼 참으로 전화를 했더니 5시 이후에는 제대로 진료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전철을 타고 가면 5시를 넘길 수도 있는 애매한 시간이다. 내일 가겠다고 말하고 그냥 퇴근해서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을지로를 걸었다. 조금 덥기는 하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금새 땀을 식혀준다. 동대문 역사문화 역에서 지하철을 타려다가 기왕 내친 김에 왕십리까지 가 보기로 했다. 무릎 통증이 있지만 걷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다. 왕십리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십리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당시 궁이라고 하면 경복궁을 말할 텐데 을지로 입구에서 왕십리 역까지 4.8 km 정도 되니 어쩌면 경복궁에서 상왕십리까지면 대략 4 ~ 5 km 정도 될 터이니 십리 정도 되는 것이겠다. 날이 길어져서 천호역에 내렸는데도 아직 날이 훤하다. 공원에는 노인들이 나무를 둘러 만들어 놓은 벤치에 앉아서 장기를 두고 있다. 머리가 하얀 노인이 벗겨진 머리를 모자로 가리고 그보다 약간 젊은 노인과 방금 시작한 장기판을 옆에서 보고 있으니 좀 지루하기도 하다가 묘수가 나올 때는 눈이 번쩍 뜨인다. 한참 수세에 몰리던 흰머리 노인이 빨간 색을 잡았는데 말을 움직일 때마다 시간이 꽤 길어 지루했지만 중간부터는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묘수가 펼쳐지더니 포(包) 하나로 왕 근처를 종횡무진 뛰어 다니면서 서너 개의 말들을 잡아 패권을 거머쥐었다. 그러다 검은 머리 노인의 반격을 받으면서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흰 머리 노인은 검은 머리 노인의 말들을 거의 다 잡아먹고 나서는 단숨에 외통수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오랜만에 이른 퇴근이라 아파트 상가에 있는 미용실에 들렸다. 나보다 앞서 머리를 자르고 있는 청년은 머리에 멋을 내기 위해 주문이 다양하다. 그에 비하면 내 머리는 단순하다. 그냥 대충 머리를 짧게 깎는 것은 별도로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준다. “사장님은 머리 자르는 거 말고 뭐 하는 걸 좋아하세요?” 나는 미용실 원장을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아이구. 내가 머리 자르는 걸 좋아하는 줄 아는가배? 나도 이 일이 힘들고 할 수만 있다면 그만 두고 놀고 싶어요.” “그러니까. 뭘 하면서 놀고 싶으냐구요.” “글쎄, 뭐 딱히 요거다 하고 하고 싶은 것은 없는데…” 그러고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여행을 가고 싶어. 엘에이(LA)에 가 보고 싶어요.” 그런다. 정말 뜻 밖의 대답이다. 자신은 여행을 가고 싶은데 적어도 2주 정도 가게를 비워야 하기 때문에 그 동안에 논을 벌 수 없으니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면 문에다 ‘미국 여행을 가야 하기 때문에 2주간 문을 닫을 예정이다’라고 한 달 전에 써 붙이세요. 그러면 사람들이 조금 일찍 오거나 나중에 오겠지요.” 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다. 2주간 여행을 하고 오면 단골 손님을 다 놓친다고 걱정한다. “그러면 평생 여행은 할 수 없겠지요. 나중에 늙어서는 움직일 힘이 없으니 여행은 그저 유튜브나 티브이로만 다닐 수 있겠네요.” 아줌마는 그럴 꺼 같다면서 조금은 허탈해하며 웃는다. 사람들에게는 늘 뭔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다. 그거야 각자 다 다르겠지만 그것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대부분 똑같다. 바쁘게 돈을 벌면서 사느라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여유가 없었다. 정년 퇴직을 하고 나서도 아직 움직일 힘이 남아 있으면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며 할 일을 찾아 나선다. 돈이 되지 않는다면 그냥 해 보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그저 아무 쓰잘데 없는 사치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러다가 정말로 몸에 병이 들고 먼 거리를 움직일 힘마저 없어지면 자기에게도 뭔가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회상한다. 그러나 이미 때를 놓쳤다며 아쉬움마저 접어 버린다.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고 보니까 말이야, 종교에서 내세우는 것들이 다 허황된 거짓 같애.” 아줌마는 예수가 물 위를 걷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게 하고 했던 기적이라는 것은 어쩌면 마술이거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한다. “맞아요. 그거 다 꾸며낸 이야기들이에요. 사람들은 벌써 기원전 3천년 전에도 길가메시 서사시처럼 신화를 만들어 냈잖아요. 그게 그리스 로마 신화로 더욱 발전하고 구약성서와 신약까지 뼈대가 된 이야기에 살이 붙고 털이 나서 이제는 목사나 중들이 좀 무지한 사람들을 회유하고 협박해서 갈취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잖아요.” 어째 이야기가 기존 종교에 대한 성토장으로 변질된다. “그래도 사람이 늙으면 마음을 의탁할 종교가 필요할 것 같아요.” 아줌마는 이제 도(道)를 깨우친 사람 같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런데 그냥 교회나 절에 가기만 한다고 해서 마음을 의탁할 수는 없을 거에요. 그런데 가면 성금함이나 불전함에 본인이 과하다고 생각할 만큼 돈을 넣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실 수 있겠어요?” 하고 물으니 “그냥 정성껏 조금만 내면 되지.” 하고 대답하면서 아줌마가 고민에 젖는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닐 꺼에요. 다른 사람은 많이 내는데 적게 내면서 마음의 위로는 많이 받아 가려고 하면 안 될 겁니다. 목사님도 중 님들도 사장님이 내는 성금의 양만큼 위로를 해줄 거에요. 신(神)이 없다고 확신하던 미용실 사장님도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마음을 의탁할 종교가 필요할 거라고 하니 이래저래 앞으로 발전할 미래 산업은 종교업(宗敎業) 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번 주말에는 어느 산에 갈꺼에요?” 머리를 자르고 나오는데 아줌마가 묻는다. “오대산이요.” 하고 대답을 했지만 아직 성치 않은 무릎을 끌고 과연 오대산에 갈 수 있을 지 나도 잘 모르겠다.

Walking

Seoul, South Korea
bethewise photo
time : May 19, 2022 4:02 PM
duration : 1h 13m 56s
distance : 5.2 km
total_ascent : 37 m
highest_point : 123 m
avg_speed : 4.2 km/h
user_id : bethewise
user_firstname : 상복
user_lastname : 박
오후 4시에 사무실에서 나왔다. 전에 다니던 논현동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라도 찍어볼 참으로 전화를 했더니 5시 이후에는 제대로 진료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전철을 타고 가면 5시를 넘길 수도 있는 애매한 시간이다. 내일 가겠다고 말하고 그냥 퇴근해서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을지로를 걸었다. 조금 덥기는 하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금새 땀을 식혀준다. 동대문 역사문화 역에서 지하철을 타려다가 기왕 내친 김에 왕십리까지 가 보기로 했다. 무릎 통증이 있지만 걷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다. 왕십리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십리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당시 궁이라고 하면 경복궁을 말할 텐데 을지로 입구에서 왕십리 역까지 4.8 km 정도 되니 어쩌면 경복궁에서 상왕십리까지면 대략 4 ~ 5 km 정도 될 터이니 십리 정도 되는 것이겠다. 날이 길어져서 천호역에 내렸는데도 아직 날이 훤하다. 공원에는 노인들이 나무를 둘러 만들어 놓은 벤치에 앉아서 장기를 두고 있다. 머리가 하얀 노인이 벗겨진 머리를 모자로 가리고 그보다 약간 젊은 노인과 방금 시작한 장기판을 옆에서 보고 있으니 좀 지루하기도 하다가 묘수가 나올 때는 눈이 번쩍 뜨인다. 한참 수세에 몰리던 흰머리 노인이 빨간 색을 잡았는데 말을 움직일 때마다 시간이 꽤 길어 지루했지만 중간부터는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묘수가 펼쳐지더니 포(包) 하나로 왕 근처를 종횡무진 뛰어 다니면서 서너 개의 말들을 잡아 패권을 거머쥐었다. 그러다 검은 머리 노인의 반격을 받으면서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흰 머리 노인은 검은 머리 노인의 말들을 거의 다 잡아먹고 나서는 단숨에 외통수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오랜만에 이른 퇴근이라 아파트 상가에 있는 미용실에 들렸다. 나보다 앞서 머리를 자르고 있는 청년은 머리에 멋을 내기 위해 주문이 다양하다. 그에 비하면 내 머리는 단순하다. 그냥 대충 머리를 짧게 깎는 것은 별도로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준다. “사장님은 머리 자르는 거 말고 뭐 하는 걸 좋아하세요?” 나는 미용실 원장을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아이구. 내가 머리 자르는 걸 좋아하는 줄 아는가배? 나도 이 일이 힘들고 할 수만 있다면 그만 두고 놀고 싶어요.” “그러니까. 뭘 하면서 놀고 싶으냐구요.” “글쎄, 뭐 딱히 요거다 하고 하고 싶은 것은 없는데…” 그러고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여행을 가고 싶어. 엘에이(LA)에 가 보고 싶어요.” 그런다. 정말 뜻 밖의 대답이다. 자신은 여행을 가고 싶은데 적어도 2주 정도 가게를 비워야 하기 때문에 그 동안에 논을 벌 수 없으니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면 문에다 ‘미국 여행을 가야 하기 때문에 2주간 문을 닫을 예정이다’라고 한 달 전에 써 붙이세요. 그러면 사람들이 조금 일찍 오거나 나중에 오겠지요.” 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다. 2주간 여행을 하고 오면 단골 손님을 다 놓친다고 걱정한다. “그러면 평생 여행은 할 수 없겠지요. 나중에 늙어서는 움직일 힘이 없으니 여행은 그저 유튜브나 티브이로만 다닐 수 있겠네요.” 아줌마는 그럴 꺼 같다면서 조금은 허탈해하며 웃는다. 사람들에게는 늘 뭔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다. 그거야 각자 다 다르겠지만 그것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대부분 똑같다. 바쁘게 돈을 벌면서 사느라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여유가 없었다. 정년 퇴직을 하고 나서도 아직 움직일 힘이 남아 있으면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며 할 일을 찾아 나선다. 돈이 되지 않는다면 그냥 해 보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그저 아무 쓰잘데 없는 사치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러다가 정말로 몸에 병이 들고 먼 거리를 움직일 힘마저 없어지면 자기에게도 뭔가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회상한다. 그러나 이미 때를 놓쳤다며 아쉬움마저 접어 버린다.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고 보니까 말이야, 종교에서 내세우는 것들이 다 허황된 거짓 같애.” 아줌마는 예수가 물 위를 걷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게 하고 했던 기적이라는 것은 어쩌면 마술이거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한다. “맞아요. 그거 다 꾸며낸 이야기들이에요. 사람들은 벌써 기원전 3천년 전에도 길가메시 서사시처럼 신화를 만들어 냈잖아요. 그게 그리스 로마 신화로 더욱 발전하고 구약성서와 신약까지 뼈대가 된 이야기에 살이 붙고 털이 나서 이제는 목사나 중들이 좀 무지한 사람들을 회유하고 협박해서 갈취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잖아요.” 어째 이야기가 기존 종교에 대한 성토장으로 변질된다. “그래도 사람이 늙으면 마음을 의탁할 종교가 필요할 것 같아요.” 아줌마는 이제 도(道)를 깨우친 사람 같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런데 그냥 교회나 절에 가기만 한다고 해서 마음을 의탁할 수는 없을 거에요. 그런데 가면 성금함이나 불전함에 본인이 과하다고 생각할 만큼 돈을 넣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실 수 있겠어요?” 하고 물으니 “그냥 정성껏 조금만 내면 되지.” 하고 대답하면서 아줌마가 고민에 젖는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닐 꺼에요. 다른 사람은 많이 내는데 적게 내면서 마음의 위로는 많이 받아 가려고 하면 안 될 겁니다. 목사님도 중 님들도 사장님이 내는 성금의 양만큼 위로를 해줄 거에요. 신(神)이 없다고 확신하던 미용실 사장님도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마음을 의탁할 종교가 필요할 거라고 하니 이래저래 앞으로 발전할 미래 산업은 종교업(宗敎業) 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번 주말에는 어느 산에 갈꺼에요?” 머리를 자르고 나오는데 아줌마가 묻는다. “오대산이요.” 하고 대답을 했지만 아직 성치 않은 무릎을 끌고 과연 오대산에 갈 수 있을 지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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