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 역사기행-3.6강희동순, 육문중학교

강희제가 북경에서 길림을 순방(총3회)하여 송화강4부두에의 모습을 조형한 곳 康熙登船石 강희 바하이-닝구타장군 조인-노예, 권력자, (관직;표의), 조손이 조인의 3대손 동국유-외삼촌 고사기-한인문관(호종일기) 남회인(perbist);선교사 1~2만명 수행, 도로 정비 형에 이어 동생을 남편으로 섬긴 순치제의 어머니 효장문황후 “마땅히 태종 폐하 계신 곳으로 가야겠지만 태종문황제의 관은 안장된 지 오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합장은 마땅치 않다. 달리 능묘를 조성하면 백성들이 고단할 터이고 너희 부자를 떠나기 싫으니 나를 준화에 묻도록 하라.” 청태종 홍타이지는 북경 입성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만주에 그의 능이 있었다. 효장문황후의 유언은 자신을 만주의 능묘로 가져 가지 말고 청나라 수도가 된 북경 주변에 새로 조성되는 황실묘역에 묻어 달라는 것이다. 강희 27년, 76세로 장수를 누린 청나라 유일의 태황태후인 효장문황후가 손자 강희제에게 남긴 유언이다. 중국인들이 5천년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두 시대가 있다. ‘한당지성(漢唐之盛)’과 ‘강건성세(康乾盛世)’이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융성시대와 청나라 최전성기인 강희제와 건륭제의 치세기간을 말한다. 천고일제(千古一帝)라고 칭송을 받는 강희제는 61년간의 치세기간을 통해서 명나라 반란세력을 일소(一掃)하고 청왕조 안정의 기틀을 닦았다. 건륭제 역시 100명이 넘는 강희제의 손자 가운데 일찌감치 영민한 자질을 보여서 강희제가 직접 궁중에서 키웠다. 건륭제 역시 60년이 넘는 치세를 통하여 재정을 확충하고 영토를 넓혀 오늘날 현대중국의 판도를 다졌다. 이 둘은 문화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겨서 강희제의 과 건륭제의 는 역사상 가장 큰 편찬사업이다. 청나라는 누루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이래 2대 청태종, 3대 순치제에 이르기까지 황위가 순탄하게 계승되지 못했다. 황실 내부의 분란 속에서 실력자들 간의 타협점을 찾아서 황위가 결정되었다. 순치제의 아들인 4대 강희제부터 비로소 순탄하게 황위가 계승되었다. 이러한 혼란기에 효장문황후는 6살로 즉위한 아들 순치제와 8살에 즉위한 손자 강희제의 버팀목이 되어서 를 이룩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의 이면에는 형과 동생 두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해야 했던 한 여성의 굴곡진 인생사가 있다. 효장문황후는 1613년 몽골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몽골여성으로서 성씨는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 이름은 포목포태(布木布泰)이다. 몽골어로는 인데 징기스칸의 동생 카사르 집안으로 몽골 황족이다. 만주족은 명나라를 치기 전에 우호세력으로서 몽골족과 화친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통혼정책을 썼다. 누루하치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 청태종 역시 몽골 여성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1625년에 누르하치의 8번째 아들인 홍타이지의 측복진(侧福晋: 측실)이 되었고, 1636년 홍타이지가 연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하면서, 그녀는 5궁 중 말단인 차서궁(次西宮)의 주인이 되어 영복궁 장비(永福宮 莊妃)에 봉해졌다. 남편인 홍타이지의 정식황후는 그녀의 고모이고 또 다른 후비는 친언니이다. 청태종은 남편이자 고모부인 것이다. 시동생이자 두 번째 남편인 도르곤의 다른 정실부인은 그녀의 사촌언니이기도 하다. 모두가 몽골귀족 박이제길특씨 가문 출신이다. 오늘날의 촌수개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유목민족인 만주족이 이룩한 청황실의 복잡한 가계도이다. 남편 홍타이지가 급사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낳은 푸림(복림)은 9번째 황자에 불과하여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푸림이 황실 간의 경쟁과 타협의 결과 장자인 후거를 제치고 황제(순치제)가 됨으로써 그녀는 황태후로 봉해졌다. 순치제가 황위를 버리고 출가하면서 어린 손자 강희제가 즉위하자 그녀는 다시 태황태후로 봉해졌다. 화려한 장막 뒤에 가려진 효장문황후의 굴곡진 삶은 누루하치가 사망했을 때에 도르곤의 생모를 순장한 사건에 기인한다. 누루하치는, 명나라 영원성 공성전에서 적장 원숭환의 네델란드제 홍의포 포탄에 중상을 입고 1626년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한다. 평소에 누루하치는 네 번째 정실인 도르곤의 생모 대복진 울나나라 씨를 가장 총애하였다. 남편이 죽으면 권력은 생전에 총애하던 부인과 그 소생들이 차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르곤의 형제는 어렸고, 황위는 도르곤보다 20세 연상인 8남 홍타이지에게 돌아갔다. 홍타이지를 옹립한 세력들은 도르곤의 생모가 대비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경계해, 누루하치의 유명이라고 하여 생모를 순장할 것을 결정했다. 그녀가 어린 아들 3형제의 안전을 보장받고 37세에 순장당함에 따라 도르곤 3형제는 졸지에 부모를 잃게 되었다. 이때 도르곤은 불과 15세였고, 7살 위 형 아지거와 두 살 아래 동생 도도가 있었다. 홍타이지는 어린 동생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그들을 모두 패륵에 봉하고 황실조정에 출사케 하였다. 자신의 입지를 파악한 도르곤은 슬픔을 숨기고 홍타이지를 적극적으로 따랐고 1628년 17세의 나이로 홍타이지를 따라 몽골원정에 참가하여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19세에는 명나라를 원정하여 탁월한 전공을 세워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24세가 되던 1635년에는 몽골원정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원나라는 명나라에 중원을 빼앗기고 북방으로 쫒겨나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원정 승리 덕분에 만주몽골연맹을 공고히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이 전공으로 생모를 잃은 지 10년 만에 황실 권력서열 3위로 부상하였다. 1643년에 56세의 홍타이지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냥 중 낙마 사고로 급사하자 청왕조는 다시 한번 후계자 경쟁에 휘말리게 된다. 이번에는 도르곤이 스스로 황제가 되거나 후계자를 결정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홍타이지의 후계자로서 도른곤보다 3살 위인 홍타이지의 장남 후거가 경쟁자로 부상했으나 실력은 도르곤이 한수 위였다. 도르곤의 동복형제 아지거와 도도는 각기 팔기군을 거느리고 있어서 도르곤의 막강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후거는 홍타이지의 장남으로서 황위승계권이 있었고, 도르곤은 팔기군을 배경으로 하여 유목민족의 전통인 형제상속을 주장했다. 합의를 보지 못하면 실력대결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도르곤은 후계자를 결정하는 황실의장회의에 절충책을 내놓았다. 도르곤은 후거의 주장대로 부자승계를 수용하되 황위는 후거가 아닌 제3의 인물인 홍타이지의 정식 후비(后妃)인 오궁(五宮) 소생 중 장남인 9황자 푸림(복림)을 황위에 올리자고 제안했다. 대신에 후거를 지지하는 정친왕 지르하란과 자신을 각각 좌우 섭정왕으로 삼아서 정무를 보는 조건을 내걸었다. 도르곤은 사랑하는 형수의 아들을 황위에 올리고 자신보다 세 살 위인 경쟁자이자 조카인 후거를 배제하였다. 의정왕대신회의를 주관하던 예친왕 다이샨은 도르곤의 절충책에 동의하였다. 이리하여 1643년 10월 8일, 푸림은 성경(심양) 고궁 대정전(大政殿)에서 겨우 6세의 나이로 황위에 오르니 이이가 제3대 황제 순치제이다. 순치제의 모후는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올릴 수 있었고, 도르곤은 황제의 자리를 양보하는 대신 순치제의 어머니이자 형수이기도 한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형수를 사랑한 도르곤은 사랑을 얻는 대신에 그녀가 낳은 아들을 황위에 올려주는 거래를 한 것이다. 그녀가 바로 미모와 지성을 고루 갖춘 효장문황후이다. 그녀는 시동생에게 개가함으로서 황실을 지켰고, 도르곤은 사랑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순수한 사랑인지 아니면 어머니를 순장시킨 형의 아내를 빼앗음으로 형에게 복수를 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도르곤은 39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섭정왕과 황숙의 지위를 누렸고, 그가 죽고 나서야 순치제는 비로소 친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도르곤은 한때의 경쟁자인 후거를 옥에 가두고 옥사시킴으로서 황실 내에 적대세력을 만들었다. -아래에 연결-

Sightseeing

이로 인해 사후에 반대세력의 참소로 부관참시를 당하고 예친왕의 지위까지 박탈당했으니 참으로 권력무상이라고 하겠다. 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효장문황후는 오로지 아들 순치제가 자립할수 있도록 대비로서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순치제는 모후의 기구한 운명을 싫어했는지 모후를 멀리했다. 그는 총비 동악비의 요절에 인생무상을 느꼈는지 황위를 버리고 오대산으로 출가했다. 정사는 그가 천연두로 인하여 24세로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순치제가 남겼다는 출가시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효장문황후에게는 손자 강희제를 보살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제는 모후가 아닌 태황태후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각각 황위에 오른 아들과 손자는 효장문황후의 미래였고 인생 그 자체였다. 8살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손자 강희제가 어느덧 30초반의 장년이 되고 청나라가 안정기로 접어들 무렵, 효장문황후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76세로 사망하면서 회한의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이제는 한 여성으로 돌아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미안함으로, 본남편 청태종 옆에 묻히기를 사양하고 따로 묻히기를 소원했다. 만주 몽골족의 풍습으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데리고 사는 형사취수의 전통이 있었지만 이미 한족문화에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자신의 핏줄인 아들과 손자 옆에 묻히는 것이 편안했을 것이다. 권력과 사랑 이야기는 인류역사를 관통하는 영원한 주제이다.
Xiaobaishan, Jilin, PRC
Karuna photo
time : Jul 18, 2019 5:37 PM
duration : 1h 7m 23s
distance : 15.3 km
total_ascent : 118 m
highest_point : 257 m
avg_speed : 19.1 km/h
user_id : Karuna
user_firstname : KH
user_lastname : Suk
강희제가 북경에서 길림을 순방(총3회)하여 송화강4부두에의 모습을 조형한 곳 康熙登船石 강희 바하이-닝구타장군 조인-노예, 권력자, (관직;표의), 조손이 조인의 3대손 동국유-외삼촌 고사기-한인문관(호종일기) 남회인(perbist);선교사 1~2만명 수행, 도로 정비 형에 이어 동생을 남편으로 섬긴 순치제의 어머니 효장문황후 “마땅히 태종 폐하 계신 곳으로 가야겠지만 태종문황제의 관은 안장된 지 오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합장은 마땅치 않다. 달리 능묘를 조성하면 백성들이 고단할 터이고 너희 부자를 떠나기 싫으니 나를 준화에 묻도록 하라.” 청태종 홍타이지는 북경 입성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만주에 그의 능이 있었다. 효장문황후의 유언은 자신을 만주의 능묘로 가져 가지 말고 청나라 수도가 된 북경 주변에 새로 조성되는 황실묘역에 묻어 달라는 것이다. 강희 27년, 76세로 장수를 누린 청나라 유일의 태황태후인 효장문황후가 손자 강희제에게 남긴 유언이다. 중국인들이 5천년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두 시대가 있다. ‘한당지성(漢唐之盛)’과 ‘강건성세(康乾盛世)’이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융성시대와 청나라 최전성기인 강희제와 건륭제의 치세기간을 말한다. 천고일제(千古一帝)라고 칭송을 받는 강희제는 61년간의 치세기간을 통해서 명나라 반란세력을 일소(一掃)하고 청왕조 안정의 기틀을 닦았다. 건륭제 역시 100명이 넘는 강희제의 손자 가운데 일찌감치 영민한 자질을 보여서 강희제가 직접 궁중에서 키웠다. 건륭제 역시 60년이 넘는 치세를 통하여 재정을 확충하고 영토를 넓혀 오늘날 현대중국의 판도를 다졌다. 이 둘은 문화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겨서 강희제의 과 건륭제의 는 역사상 가장 큰 편찬사업이다. 청나라는 누루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이래 2대 청태종, 3대 순치제에 이르기까지 황위가 순탄하게 계승되지 못했다. 황실 내부의 분란 속에서 실력자들 간의 타협점을 찾아서 황위가 결정되었다. 순치제의 아들인 4대 강희제부터 비로소 순탄하게 황위가 계승되었다. 이러한 혼란기에 효장문황후는 6살로 즉위한 아들 순치제와 8살에 즉위한 손자 강희제의 버팀목이 되어서 를 이룩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의 이면에는 형과 동생 두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해야 했던 한 여성의 굴곡진 인생사가 있다. 효장문황후는 1613년 몽골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몽골여성으로서 성씨는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 이름은 포목포태(布木布泰)이다. 몽골어로는 인데 징기스칸의 동생 카사르 집안으로 몽골 황족이다. 만주족은 명나라를 치기 전에 우호세력으로서 몽골족과 화친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통혼정책을 썼다. 누루하치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 청태종 역시 몽골 여성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1625년에 누르하치의 8번째 아들인 홍타이지의 측복진(侧福晋: 측실)이 되었고, 1636년 홍타이지가 연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하면서, 그녀는 5궁 중 말단인 차서궁(次西宮)의 주인이 되어 영복궁 장비(永福宮 莊妃)에 봉해졌다. 남편인 홍타이지의 정식황후는 그녀의 고모이고 또 다른 후비는 친언니이다. 청태종은 남편이자 고모부인 것이다. 시동생이자 두 번째 남편인 도르곤의 다른 정실부인은 그녀의 사촌언니이기도 하다. 모두가 몽골귀족 박이제길특씨 가문 출신이다. 오늘날의 촌수개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유목민족인 만주족이 이룩한 청황실의 복잡한 가계도이다. 남편 홍타이지가 급사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낳은 푸림(복림)은 9번째 황자에 불과하여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푸림이 황실 간의 경쟁과 타협의 결과 장자인 후거를 제치고 황제(순치제)가 됨으로써 그녀는 황태후로 봉해졌다. 순치제가 황위를 버리고 출가하면서 어린 손자 강희제가 즉위하자 그녀는 다시 태황태후로 봉해졌다. 화려한 장막 뒤에 가려진 효장문황후의 굴곡진 삶은 누루하치가 사망했을 때에 도르곤의 생모를 순장한 사건에 기인한다. 누루하치는, 명나라 영원성 공성전에서 적장 원숭환의 네델란드제 홍의포 포탄에 중상을 입고 1626년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한다. 평소에 누루하치는 네 번째 정실인 도르곤의 생모 대복진 울나나라 씨를 가장 총애하였다. 남편이 죽으면 권력은 생전에 총애하던 부인과 그 소생들이 차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르곤의 형제는 어렸고, 황위는 도르곤보다 20세 연상인 8남 홍타이지에게 돌아갔다. 홍타이지를 옹립한 세력들은 도르곤의 생모가 대비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경계해, 누루하치의 유명이라고 하여 생모를 순장할 것을 결정했다. 그녀가 어린 아들 3형제의 안전을 보장받고 37세에 순장당함에 따라 도르곤 3형제는 졸지에 부모를 잃게 되었다. 이때 도르곤은 불과 15세였고, 7살 위 형 아지거와 두 살 아래 동생 도도가 있었다. 홍타이지는 어린 동생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그들을 모두 패륵에 봉하고 황실조정에 출사케 하였다. 자신의 입지를 파악한 도르곤은 슬픔을 숨기고 홍타이지를 적극적으로 따랐고 1628년 17세의 나이로 홍타이지를 따라 몽골원정에 참가하여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19세에는 명나라를 원정하여 탁월한 전공을 세워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24세가 되던 1635년에는 몽골원정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원나라는 명나라에 중원을 빼앗기고 북방으로 쫒겨나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원정 승리 덕분에 만주몽골연맹을 공고히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이 전공으로 생모를 잃은 지 10년 만에 황실 권력서열 3위로 부상하였다. 1643년에 56세의 홍타이지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냥 중 낙마 사고로 급사하자 청왕조는 다시 한번 후계자 경쟁에 휘말리게 된다. 이번에는 도르곤이 스스로 황제가 되거나 후계자를 결정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홍타이지의 후계자로서 도른곤보다 3살 위인 홍타이지의 장남 후거가 경쟁자로 부상했으나 실력은 도르곤이 한수 위였다. 도르곤의 동복형제 아지거와 도도는 각기 팔기군을 거느리고 있어서 도르곤의 막강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후거는 홍타이지의 장남으로서 황위승계권이 있었고, 도르곤은 팔기군을 배경으로 하여 유목민족의 전통인 형제상속을 주장했다. 합의를 보지 못하면 실력대결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도르곤은 후계자를 결정하는 황실의장회의에 절충책을 내놓았다. 도르곤은 후거의 주장대로 부자승계를 수용하되 황위는 후거가 아닌 제3의 인물인 홍타이지의 정식 후비(后妃)인 오궁(五宮) 소생 중 장남인 9황자 푸림(복림)을 황위에 올리자고 제안했다. 대신에 후거를 지지하는 정친왕 지르하란과 자신을 각각 좌우 섭정왕으로 삼아서 정무를 보는 조건을 내걸었다. 도르곤은 사랑하는 형수의 아들을 황위에 올리고 자신보다 세 살 위인 경쟁자이자 조카인 후거를 배제하였다. 의정왕대신회의를 주관하던 예친왕 다이샨은 도르곤의 절충책에 동의하였다. 이리하여 1643년 10월 8일, 푸림은 성경(심양) 고궁 대정전(大政殿)에서 겨우 6세의 나이로 황위에 오르니 이이가 제3대 황제 순치제이다. 순치제의 모후는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올릴 수 있었고, 도르곤은 황제의 자리를 양보하는 대신 순치제의 어머니이자 형수이기도 한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형수를 사랑한 도르곤은 사랑을 얻는 대신에 그녀가 낳은 아들을 황위에 올려주는 거래를 한 것이다. 그녀가 바로 미모와 지성을 고루 갖춘 효장문황후이다. 그녀는 시동생에게 개가함으로서 황실을 지켰고, 도르곤은 사랑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순수한 사랑인지 아니면 어머니를 순장시킨 형의 아내를 빼앗음으로 형에게 복수를 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도르곤은 39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섭정왕과 황숙의 지위를 누렸고, 그가 죽고 나서야 순치제는 비로소 친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도르곤은 한때의 경쟁자인 후거를 옥에 가두고 옥사시킴으로서 황실 내에 적대세력을 만들었다. -아래에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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