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김유신

「풍운아 김유신」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이며,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구형왕(仇衡王)이라고도 한다]의 증손이다. 조부인 김무력(金武力)은 구해왕의 막내아들로 벼슬이 각간(角干)이었으며, 백제의 동북지역을 점령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554)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부친은 소판(蘇判)의 벼슬을 지낸 김서현[金舒玄, 김소연(金逍衍)이라고도 한다]으로 그도 대량주(大梁州) 도독(都督) 등을 지내며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때에 백제·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모친인 만명부인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삼국사기에는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부친인 숙흘종이 반대한 결혼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버지의 감금에서 탈출한 만명은 만노군(萬弩郡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로 부임하는 서현을 따라갔고, 그 곳에서 595년 김유신 (595 ~ 673)을 낳았다. 지금의 진천 길상산(吉祥山)은 고려 때 태령산(胎靈山)으로 불렸고, 김유신의 태를 안치했다 하여 신라 이래로 김유신사(金庾信祠)를 세워, 봄·가을로 국가에서 향(香)을 내려 제사하게 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이 반대는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 귀족(眞骨貴族)으로 편입되어 있기는 했지만, 왕족 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의 출신이 같은 진골 귀족이라 해도 당시 신라를 주도한 대귀족들과는 차이가 있었을 시사해 준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누이를 김춘추(金春秋 : 태종무열왕)와 혼인시킬 때의 극적인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춘추와 사통하여 임신한 누이를 화형(火刑)시키려고 하자, 그 사실을 안 선덕여왕이 나서서 극적으로 혼인을 성사시킨 것이다. 당시 그의 가계가 왕실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혼인하기 어려운 처지였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김춘추와 혼인한 누이는 바로 문무왕과 김인문(金仁問) 등을 낳은 문명왕후(文明王后)로서, 그 뒤 그의 일족의 세력이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이었는데, 그와 태종의 이처럼 서로 얽힌 혼인 관계는 당시 신라 사회의 관습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지소부인과의 사이에는 삼광(三光)·원술(元述)·원정(元貞)·장이(長耳)·원망(元望) 등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그리고 서자로서 군승(軍勝)이 있었다 한다. 손자로는 윤중(允中)·윤문(允文)이 있었고, 현손으로는 그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었다는 장청(長淸)의 이름이 전한다. 아우로는 삼국통일 전쟁기에 장군으로 활약한 흠순(欽純)이 있다. 윤중의 서손(庶孫) 암(巖)은 둔갑술과 병법에 능하였다 한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리던 자신의 낭도(郎徒)를 이끌었다. 629년 34세 때,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서 패배하여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 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한 그는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김춘추는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과거 적대관계에 있기도 했던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는데, 이에 앞서 교섭 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를 향해 떠날 때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군주가 되었다. 644년에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 요충인 가혜성(加兮城)·성열성(省熱城)·동화성(同火城) 등 7개 성을 점령하였다. 이듬 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 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이 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당시 전열을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가족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50보쯤 지나쳐 말을 멈춘 뒤,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는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 출발하였다. 그 우물이 재매정이라 전해진다. 또한 647년에는 비담의 난을 평정했다. 귀족 내부의 반란 세력의 우두머리는 당시 귀족회의의 장인 상대등 비담(毗曇)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월성(月城)의 왕족 세력을 공격하였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고,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閼川)은 신라의 전통적 귀족이었다. 또한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이 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이면서도 신라 중앙에 입지를 구축하게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비담의 반란 후 진덕여왕대에 치러진 세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그 전투들에서 최고지휘관을 맡았다. 진덕여왕 2년(648)에 진덕여왕 3년의 전투에서 백제의 지휘관급 100인과 군졸 8,900여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전투용 말 1만 필을 노획했다한다. 진덕여왕이 죽자 당시 귀족회의에서는 상대등이던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에 즉위한 것은 김유신과 맹세를 나눈 김춘추, 곧 태종무열왕이었다. -끝-

Sightseeing

Gyeongju-si, Gyeongsangbuk-do, South Korea
Karuna photo
time : Mar 22, 2019 10:06 PM
duration : 0h 0m 3s
distance : 0 km
total_ascent : N/A
highest_point : 70 m
avg_speed : 1.8 km/h
user_id : Karuna
user_firstname : KH
user_lastname : Suk
「풍운아 김유신」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이며,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구형왕(仇衡王)이라고도 한다]의 증손이다. 조부인 김무력(金武力)은 구해왕의 막내아들로 벼슬이 각간(角干)이었으며, 백제의 동북지역을 점령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554)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부친은 소판(蘇判)의 벼슬을 지낸 김서현[金舒玄, 김소연(金逍衍)이라고도 한다]으로 그도 대량주(大梁州) 도독(都督) 등을 지내며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때에 백제·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모친인 만명부인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삼국사기에는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부친인 숙흘종이 반대한 결혼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버지의 감금에서 탈출한 만명은 만노군(萬弩郡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로 부임하는 서현을 따라갔고, 그 곳에서 595년 김유신 (595 ~ 673)을 낳았다. 지금의 진천 길상산(吉祥山)은 고려 때 태령산(胎靈山)으로 불렸고, 김유신의 태를 안치했다 하여 신라 이래로 김유신사(金庾信祠)를 세워, 봄·가을로 국가에서 향(香)을 내려 제사하게 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이 반대는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 귀족(眞骨貴族)으로 편입되어 있기는 했지만, 왕족 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의 출신이 같은 진골 귀족이라 해도 당시 신라를 주도한 대귀족들과는 차이가 있었을 시사해 준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누이를 김춘추(金春秋 : 태종무열왕)와 혼인시킬 때의 극적인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춘추와 사통하여 임신한 누이를 화형(火刑)시키려고 하자, 그 사실을 안 선덕여왕이 나서서 극적으로 혼인을 성사시킨 것이다. 당시 그의 가계가 왕실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혼인하기 어려운 처지였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김춘추와 혼인한 누이는 바로 문무왕과 김인문(金仁問) 등을 낳은 문명왕후(文明王后)로서, 그 뒤 그의 일족의 세력이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이었는데, 그와 태종의 이처럼 서로 얽힌 혼인 관계는 당시 신라 사회의 관습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지소부인과의 사이에는 삼광(三光)·원술(元述)·원정(元貞)·장이(長耳)·원망(元望) 등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그리고 서자로서 군승(軍勝)이 있었다 한다. 손자로는 윤중(允中)·윤문(允文)이 있었고, 현손으로는 그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었다는 장청(長淸)의 이름이 전한다. 아우로는 삼국통일 전쟁기에 장군으로 활약한 흠순(欽純)이 있다. 윤중의 서손(庶孫) 암(巖)은 둔갑술과 병법에 능하였다 한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리던 자신의 낭도(郎徒)를 이끌었다. 629년 34세 때,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서 패배하여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 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한 그는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김춘추는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과거 적대관계에 있기도 했던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는데, 이에 앞서 교섭 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를 향해 떠날 때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군주가 되었다. 644년에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 요충인 가혜성(加兮城)·성열성(省熱城)·동화성(同火城) 등 7개 성을 점령하였다. 이듬 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 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이 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당시 전열을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가족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50보쯤 지나쳐 말을 멈춘 뒤,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는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 출발하였다. 그 우물이 재매정이라 전해진다. 또한 647년에는 비담의 난을 평정했다. 귀족 내부의 반란 세력의 우두머리는 당시 귀족회의의 장인 상대등 비담(毗曇)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월성(月城)의 왕족 세력을 공격하였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고,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閼川)은 신라의 전통적 귀족이었다. 또한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이 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이면서도 신라 중앙에 입지를 구축하게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비담의 반란 후 진덕여왕대에 치러진 세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그 전투들에서 최고지휘관을 맡았다. 진덕여왕 2년(648)에 진덕여왕 3년의 전투에서 백제의 지휘관급 100인과 군졸 8,900여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전투용 말 1만 필을 노획했다한다. 진덕여왕이 죽자 당시 귀족회의에서는 상대등이던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에 즉위한 것은 김유신과 맹세를 나눈 김춘추, 곧 태종무열왕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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