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an, South Korea
time : May 31, 2025 7:43 AM
duration : 5h 42m 9s
distance : 14.7 km
total_ascent : 112 m
highest_point : 145 m
avg_speed : 2.6 km/h
user_id : dbwoaud
user_firstname : 재명
user_lastname : 유
4코스 2구간은 감천항 입구를 시작으로 두송반도를 돌아 나와 다대포를 지나 몰운대로 이어지는 길이다. 13km 거리이며 걷기에 어렵지는 않다. 걸음 길, 두송반도를 지나는 숲길과 몰운대의 숲길이 초여름 더위를 피하기 좋다. 다대항은 분주하고, 해수욕장은 아늑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다대포 해수욕장은 몰운대를 기점으로 양쪽으로 있다. 낙동강 쪽 해수욕장이 넓고 시원한데 비해 다대항 쪽은 산으로 둘러 쌓인 아늑함이 있다.
두송반도는 양쪽으로 모두 공장이 드러차있다. 해운교통이 편리한 곳이니 그럴 것이다. 감천항 쪽으로는 정유탱크가 많고 다대포 쪽으로는 조선소가 있다. 감천항 입구에서 시작해서 공장지대를 한참을 지나야 두송반도 트레킹 길에 다다른다. 산업 폐기물 처리공장도 많고 페지 공장도 있다. 다 작은 규모의 사업장이다. 덕분에 곳곳에 쓰레기 더미가 있어 미관을 해친다. 정리되지 않은 길을 가다보면 이 길이 맞나 생각도 든다. 그리도 초반 3km 정도를 지나면 본격적인 트레킹 길에 다다르니 참고 갈 일이다.
감천이라는 이름은 감천2동 위치에 흘렀던 감내라고 하는 개천 때문이다. 이 감내의 '내'가 川(내 천)자로 바꿔서 감천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현재는 감내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70년대 초반 복개공사로 개천 위가 도로로 덮였다. 이 도로가 현재 감내1로이다. 길은 감천항의 높은 담장을 따라 이어진다. 담장에 물고기와 물결 상징이 심심치 않다. 감천항은 북항, 남항 등과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항국다. 동편 부두와 서편 부두로 나뉘며 주로 러시아 선박들이 입항한다.
길을 따라 공장지대를 벗어나면 본격적으로 두송분도 길이 시작된다. 두송반도는 다대포에서 보면 동쪽 해안이다. 8천만 년 전인 백악기 말에는 산기슭이었다. 공룡들이 노닐던 놀이터다. 두송반도에 눈에 잘 띄는 붉은색 퇴적층은 진흙이 굳어져 만들어진 이암 퇴적층이며, 회색 또는 황갈색의 석회암층은 석회질이 굳어 만들어진 것이다. 공룡알 화석, 나무화석, 생흔화석 등 다양한 지질유산이 있는 곳이다.
나무가 우거진 두송반도 길은 그늘이 주는 시원함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부산에도 외진곳에 속하니 사람도 별로 없다. 아마도 접근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공장들 사이로 이런 길이 숨어 있을 줄은 갈맷길이 아니라면 알지 못할 듯 하다. 두송반도 전망대를 보고 돌아나오면 곳 다대포 쪽으로 내려간다. 두송반도 전망대 가는 길에 중간 인증대가 있다. 지난번에는 찾기 쉽지 않았던 기억이 있는 데 이번에는 쉽게 찾았다. 아마도 옮긴게 아닌가 싶다.
다대포(多大浦)라는 이름은 "크고 넓은 포구"라는 의미이다. 낙동강의 토사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해수욕장이다.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져 있다. 서편 해수욕장은 부산의 다른 해수욕장과 비교해 백사장 면적이 상당히 넓고 마치 갯벌처럼 수심도 얕다. 동편 해수욕장은 해수욕장으로 수질이 적합하지 않아 수변공원으로 꾸며 사용한다. 주위에 음식점들이 다 단장해서 깨끗하다. 정돈된 수변이 안정감을 준다. 몰운대와 가까운 식당에서 물회를 먹었다. 가성비가 좀 떨어지지만 분위기는 만점이다.
몰운대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7호다. 개인사유지이다. 개인이 부산시민을 위해 개방한 곳이니 의미가 깊다.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욱 깨닫게 된다. 몰운대는 16세기까지는 '몰운도'였다. 선박을 타고 들어갔던 곳이다. 낙동강에서 내려온 토사가 퇴적되어 '몰운대'가 되었다. 8천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차곡차곡 쌓인 지층과 그 후에 생겨난 부산 일대의 지각변형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는 부산포 해전에서 정운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5.23. ~ 1598.12.16.) 초인 선조 25년(서기 1592년 ) 음력 9월 1일 새벽 이순신장군의 연합함대는 다대포와 부산포를 점령한 왜군함대를 몰아내고 남해의 제해권을 학보하고자 가덕도'를 출발하여, 다대포 앞바다에 이릅니다. 전투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순신장군은 지칠대로 지친 부하 장수를 도저히 출전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정운장군의 출전을 만류하였으나 정운 장군은 장수가 나라를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어찌 전쟁을 회피 하겠습니까. 제 한 몸 부서져 물고기 밥이 되더라도 이 전쟁의 끝을 꼭 보고 죽을 것입니다." 라고 답하며 출전을 강행하였다. 몰운대 앞바다를 지날 때 정운장군이 문득 휘하 부관에게 물었습니다. "여기는 지명이 어찌 되오?" "물운대라 하읍니다." "물운대라, 내 이름 정운의 운과 몰운대의 운이 같은 음인 것을 보면 내가 여기서 죽을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몰운대 내 표지판에서 옮김]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7년 4월 17일 을축조에 “이순신(李舜臣) 진중의 정운(鄭雲)이라는 사람이 그 대포를 맞고 죽었는데 참나무 방패 3개를 관통하고도 쌀 2석을 또 뚫고 지나 정운의 몸을 관통한 다음 선장(船藏)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如君忠義, 古今罕聞, 爲國忘身, 有死猶生
그대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었으니, 나라를 위해 던진 그 몸은 죽었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다.
人生必有死, 死生必有命, 爲人一死, 固不足惜, 君獨可傷者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은 하늘에 달렸으니, 사람으로서 한번 죽음에 아쉬워 할 이유가 없으나, 오직 그대에 관련해서는 마음이 아프도다.
- 이순신이 정운의 영전에 올린 제문인 제증참판정운문(祭贈參判鄭運文) 중에서
몰운대를 돌아나오는 길에 다대진 동헌있다. 가까운 곳에 정운공 순의비가 있으나 다리 아프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늘 그런 듯 하니 언젠가 꼭 가볼 일이다. 차가 있는 감첞아 입구로 택시로 돌아갔다. 택시를 부르고 싶을 때 부르고, 정확한 목적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 참 편리하다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느낀다. 이런 하루가 지나 갔다.
#다대포 #몰운대 #두송반도 #녹도만호정운 #부산포해전